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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인간학] 4주차 - 下

Posted in anthropologie by KeeChul Shin on the September 25th, 2008

입 벌리고 있다고 감이 떨어지지 않는다. 마르크스에게 인간은 욕구 충족을 위하여 일하는 존재이다. 일을 하는데, 혼자 하지 못한다. 여러 사람이 함께 해야 한다, 사회 안에서. 이때 사회적 관계가 인간 존재를 규정한다. 사회적 관계 중에서도 사회적 생산관계가 가장 기층적이다. 생산을 통해서만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생산 관계 위에서 여타의 사회적 관계가 성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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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철학]] 서론 강독 32주차 - 15.9~18.1

Posted in hegel by KeeChul Shin on the September 25th, 2008

조야함은 충동의 직접적 자기 추구 속에, 자신의 만족을 더우기 만족만을 향해가는 욕망 속에 있다(17.3). 인간이 욕망에 사로잡혀 욕망과 한 몸이 되면 눈에 뵈는 게 없고 점점 더 조야해진다(17.4). 나아가 그는 특정한 의지에 사로 잡힌 채(18.1) “나의 열정은 나보다 더 강력하다”(18.1)고 말할 뿐 그 열정에 사로잡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반성하지 않는다(17.5). [이에 욕망의 제한성에 갇힌 거친 열정을 반성하여 보편적인 것으로 고양시킬 도야Bildung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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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인간학] 4주차 - 上

Posted in anthropologie by KeeChul Shin on the September 22nd, 2008

자연physis은 자연 안에 실현할 목적을 가지고 있다. 자연 안에는 인간도 포함된다. 인간끼리 사는 공동사회에는 자연 안에 있는 것만으로는 따르기 힘든 점이 있다. 자연그대로, 즉 신체가 요구하는 그대로만 살 수는 없다. 인간 공동체 삶의 질서nomos를 인간 스스로 만들어 내어야 한다. physis로부터 완전히 이탈한 nomos를 만들면 될까? nomos는 physis를 본받아서 만들어져야 한다.

신이 인간을 창조를 하긴 했는데, 100% 완제품을 만들지 않았다. 마무리 공사를 인간 자신에게 맡겼다. 이것이 자유의 영역이요, 악의 근원이다. 마무리공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하느님 뜻을 실현할 수도, 거역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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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체화된 정신] 3주차 - 45~47절a

Posted in hartmann by KeeChul Shin on the September 20th, 2008

객체화된 정신은 살아있는 개인적인 혹은 공동체적인 정신으로부터 유리되어서 고립되어 있다는 점에서 일단 반죽음 상태로 들어간 정신이다. 그러나 반죽음 당함으로써 이 정신은 독자적 지속성을 갖는다. 이 독자성과 지속성을 갖는 객체화된 정신이 문화세계를 만드는 재료들이고 이것이 있어서 역사가 성립된다. 과거가 현재에서 살아나고 미래가 현재로 앞당겨진다. 이 객체화된 것이 얼마 후에 다시 살아있는 정신에 의하여 이해되고 공유된다.

‘Vordergrund전경을 요렇게 뚫고 들어가면 요러한 Hintergrund배경과 만나게 되어 있다’. 그것이 학문의 세계이다. 기껏 하르트만을 읽고 하이데거 식으로 이해하면 책을 잘못 읽은 것이다. 수학책이나 과학책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전경과 배경 사이에 필연적이지는 않아도 고정된, 안정된 통로가 있어 양자 간의 관계를 규정한다. 규정력이 loose한 영역도 있다. 예술이다. ‘어디로 들어가면 어디로 도달 한다’가 딱히 없다. 46절에서 보았듯이 예술작품은 감상자에게 어떤 방식으로 볼 것을 강제한다. 그렇지만 그 강제력은 절대적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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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철학]] 서론 강독 31주차 - 14~15.8

Posted in hegel by KeeChul Shin on the September 17th, 2008

해석이 무엇인가? ‘어떤 구절에 밑줄을 칠 것인가’이다. 세상의 모든 텍스트는 철학적 텍스트로 재해석될 수 있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모든 텍스트는 해석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텍스트 뒤에 있는 수 많은 거미줄을 발견할 수 있다.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학문이 성립하는 기반이 마련된다.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다는 기대, 이를 촉구하고 고무하고 격려하는 것이 학문이다. 눈 앞의 텍스트를 한풀 꺾어서 봐야 한다. 학문은 눈 앞에 보이는 것 뒤에 있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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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체화된정신] 2주차 - 44절

Posted in hartmann by KeeChul Shin on the September 17th, 2008

정신은 객체화 됨으로써 살아 있는 정신보다 오래 지속된다. 하르트만은 1950년에 죽었다. 그런데 58년 전에 죽은 사람의 정신이 이 책에 담겨 있다. 나아가 2000년 전에 죽은 사람 정신도 각각의 책에서 뿌시럭 거리고 있다. 정신이 살아있는 정신에서 떨어져 나가니까 오히려 오래 간다. 그런 까닭에 나아가 역사도 성립할 수 있다.

정신이 밖으로 나가서 자립화할 때, 여러가지 방식으로 자립화한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책이다. 책이 가장 중요하다. 복잡 다단한 것을 단순화시킨 것이니까. 만일 형상화된 것으로 남긴다고 해보자. 조각 공원 수만 평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책은 다양한 내용을 추리고 추려서 가장 단순한 형태로 압축한 것이다. 그러한 정신이 객체화되어 자립화되면 무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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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인간학] 3주차

Posted in anthropologie by KeeChul Shin on the September 17th, 2008

플라톤에 따르면 인간은 이원적 존재다. 근원들 중 하나는 Idea세계에, 다른 하나는 감각 세계에 속한다. 그래서 괴롭다. 이 복잡한 상황을 정리하기 위하여 등장하는 것이 인간의 세 가지 기능 - 욕망, 기백, 이성 - 이다. 정신이 이성적 사유를 통하여 욕망을 통제해야 한다. 이에 플라톤은 이성을 머리에, 기백을 가슴에, 욕망을 배에 위치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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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인간학] 2주차 - 下

Posted in anthropologie by KeeChul Shin on the September 11th, 2008

과학적 인간관은 중세 보편논쟁의 성과를 바탕으로 인간 능력에 대한 제한적 재인식으로서 등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이성적 사유를 하고, 형이하학적 경험적 세계를 잘 알고, 거기에서 지식을 얻는 존재이다. 인간은 형이상학적 존재가 아니다. 경험적 존재다. 신체, 신체로부터 나오는 욕구체계, 그로부터 빚어지는 감정이 중요하다. 형이상학적 통찰, 영원성은 미덥지 않다. 인간을 그렇게 보자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을 금수와 다를 바 없는 존재로 보는 셈이다. 여러분은 이 말에 동의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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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철학]] 서론 강독 30주차 - 문단13

Posted in hegel by KeeChul Shin on the September 11th, 2008

자연의 모방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이래 예술의 원리로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헤겔에 따르면 자연의 모방에 입각한 예술의 목적은 기억이요(13.11), 그 예술은 자유롭고 아름다운 예술일 수 없다(13.12). 헤겔은 예술을 단순 모방 이상의 것으로 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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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인간학] 2주차 - 上

Posted in anthropologie by KeeChul Shin on the September 10th, 2008

이성적 사유는 자율성Autonomie은 가지고 있지만 자족성Autarkie은 가지고 있지 않다. 자연의 지식을 얻는 데에서도, 실천의 지침을 얻는 데에서도. 이에 ‘인간은 사유하는 존재이다’라는 인간관에 변화가 생긴다. 신화적 인간관과 합리주의적 인간관이 만나 신화적 인간관을 remake한다. 그것이 중세의 신학적 인간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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