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철학]] 서론 강독 40주차 - 23.28~24.14
헤겔에 따르면 ‘내용과 형식의 완전한 합치’라는 Ideal이념상을 추구Erstreben하는 것이 상징적 예술이고, 이념상을 성취Erreichen한 것이 고전적 예술이며, 초월Ueberschreiten한 것이 낭만적 예술이다. 따라서 낭만적 예술 형식은 예술의 종말이다. 낭만적 예술 형식 다음의 것은 예술이 아니라 다음 단계인 종교이다. 예술의 궁극목적이 예술 아닌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변증법적 전개 과정이다. 변증법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맹아를 완전히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가진다. 실현 후 원점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벗어나 질적으로 전혀 다른 영역으로 넘어간다. 자기 안의 맹아를 완전히 실현하여 자기를 부정하고 넘어가는 바 이를 ‘자기내초출自己內超出’이라고 한다.
A와 -A는 동일한 사태Sache의 두 측면이다. 양자를 자신의 계기로 가지는 전체에서 보면, A와 -A는 서로 대립,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 입각하여 정치철학 맥락에서 보면 변증법은 모순, 대립하는 것을 모두 인정하고 가자는 지극히 보수적인 태도가 된다. 이와 달리 [[정신현상학]]의 도정을 생각해보라. 감각적 확실성에서 출발하여 절대적 지까지 간다. 더 나은 것, 새로운 것이 등장하는 과정이다. 이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완성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로부터 더 나은 뭔가 새로운 것이 등장할 수 있는 싹이 이 안에 있다는 논의가 가능하다. 이때 변증법은 혁명의 방법론이 될 수 있다. 변증법에서는 이 두가지가 모두 이야기될 수 있다. 어떤 측면을 변증법의 진수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일 것이냐에 따라 썩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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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인간학] 15주차 -上
베르그송의 인간관을 파악하는 초점은 지속과 자유이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인가, 자연법칙에 지배되는 존재인가’의 문제를 베르그송은 지속의 관점에서 인간의 자유를 논함으로써 규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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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
RP: 김희원. - 16,000
PZ: 김희원, 박주영. - 5,000
[[예술철학]] 서론 강독 38주차 - 22.1~23.16
[[정신현상학]]에 따르면 진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주체로서도 사유되어야 한다. 또한 헤겔에서 진리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이슬람교와 유태교는 신을 추상적으로만 파악한다. 내가 신을 주체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신을 단순한 고정된 실체로서만이 아니라 주체로서도 파악하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헤겔은 기독교가 인간 주체성Subjektivitaet의 본격적 시작이라고 파악한다. 예수가 저 하늘에만 머물러 있는 신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살았던 구체적인 신이기 때문이다. 이에 기독교의 신은 단순한 일자가 아니요 우리의 삶으로 들어온 구체적 일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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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인간학] 14주차 -下 (신원규 필사)
베르그송은 헤라클레이토스처럼 세계를 흐르는 것으로 보고 이를 지속(duration)으로 표현한다. 물체도 생각도 모두 흐르는 것이다. 다만 물체는 느리게 흘러 굳어 있는 듯한 것이고, 의식 가운데 순수한 의식인 마음은 빨리 흐르는 것이다. 즉 흐름 연속성에서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우리의 의식 활동 중에도 거의 흐르지 않는 매일의 의식이 있고, 날아가듯 흐르는 순수 의식이 있다. 이러한 것이 세계의 참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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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인간학] 13주차 -下 (신원규 필사)
도덕법칙이란 자연적 현상에서 찾을 수 없다. 도덕적 선함의 근거는 인간 이성이 스스로에게 명령하는 당위의 규칙에 따랐는가에 있다. 예지계와 현상계의 두 세계 속에서 도덕적 정당성 여부는 예지계에만 관계한다. 그리고 도덕법칙은 발견해야 하는 것으로, 이를 발견하는 것이 실천이성이다. 따라서 우리는 순수한 실천이성에 따라 우리 자신을 도덕법칙 아래에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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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철학]] 서론 강독 39주차 - 23.17~27
예술 작품이 예술 작품으로서 탁월하려면 고전적 예술 작품의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 그렇다고 그것이 진리를 충분히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낭만적 예술의 특징인 ‘예술 고유의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자기 초극의 과정을 거쳐 비예술, 절대적 정신의 다음 단계인 종교로 나아가야 한다. 더 나아가 철학으로 가면? 더 이상 형식이 필요없는 영역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이 낭만적 예술이 가진 자기 초극의 변증법의 특징이다. 외워라.
변증법이 뭐냐? 제발 정반합이라고 말하지 말라. 정반합의 변증법은 라볶이 이야기할 때에나 쓰기 바란다. 변증법은 way-up, 더 고차적인 것으로 올라가려는 것이다. 고전적 예술 형식에만 머물러 있으면 올라설 수 없다. 따라서 전체의 진리라는 맥락에서 보면 자기 초극하는 낭만적 예술형식이 더 탁월하다. 그리고 더 위로 올라가 예술의 종언, 예술의 종말을 가능하게 한다. ‘예술 이제 안합니다~’는 식의 종말이 아니다. 전체적 진리의 맥락에서의 예술의 종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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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철학]] 서론 강독 36주차 - 19.12~26
절대적 정신에 관하여 ‘타재에 있으면서도 자기의 곁에 있다’는 표현이 있다. 자기의 identity를 고수하면서도 타자의 입장을 충실히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이다. 자기Selbst와 타자를 동시에 보는 태도이다. 한 단계 위에 서서 보는 것이다. 그렇게 의식이 올라 서는 것, 그것을 물질적 관계 속에서 구현하는 것을 변증법적 지양이라고 한다. 영원히 교섭할 수 없는 타자를 교섭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내가 타자일 수 있고 타자가 나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신현상학 나오는 개념의 운동이다. 고정된 것을 유동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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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인간학] 14주차 -上
내가 신체적인 여건들을 규정하는 자연 법칙들에 전적으로 복속되어 있어서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자유 영역이 없다면, 나의 행위는 철저하게 자연 법칙의 결과에 불과하다. 이에 내가 옆에 있는 사람을 죽였다고 하여도, 옆에 있는 사람을 죽인 것은 내가 아니다. 자연 법칙이 죽인 것이다. 인과 필연적 사건들이 옆 사람을 죽인 것이니 자연법칙적으로 따질 일이지 도덕적으로 따질 일이 아니다. 이에 나에게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 나에게는 잘못 없다. 잘못을 물으려면 자연 법칙에게 물어야 한다. 그러면 도덕적으로 책임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러니 자유의지가 필요하다. 이는 도덕적 요구이다. 아니면 다 같이 도덕적이기를 포기하고 짐승으로서 살아가야 한다. 자유의지가 있음은 도덕적 요구이지 논증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칸트는 논증하려고 애썼다. 실은 순환 논법이었다. 그렇다고 칸트가 논증 하지 않고 선언만 했으면 철학 이론으로 정립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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