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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기철 ( http://dieBildung.net ) Date : 2008/05/16  Hit : 5989  Recommend : 668   
   Download #1 : 공동정신_18절발제.pdf (306.9 KB), Download : 109
 [공동정신] 3주차 - 18절
08.03.21. (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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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르트만은 역사철학적 서론에서 정리한 헤겔 역사철학의 12가지 테제를 18절에서 하나하나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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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절, 헤겔의 테제에 대한 태도 표명 (발표자 김희원)

a. 헤겔의 발견과 발견자의 착오
  - 헤겔에게 있어서 큰 규모의 살아 있는 정신을, 모든 정신영역에 걸친 그의 근본현상들에서 처음으로 철학적으로 파악하였고, 그의 고유한 삶을 작은 규모의 살아있는 정신과 나란히 해서, 또는 이 정신의 위에서도, 밝혀 보였다는 사실은 위대한 점이다. 그러나 이 발견은 그 자신의 사유 속에서 하나의 일반적이고 고도의 사변적인 정신의 형이상학으로 말미암아 허사가 되고 말았다. … 진짜로 관찰되고 적실하게 파악된 것이 여기서는 변증법적으로 구성되고 꾸며내어진 것과 아주 긴밀히 뒤얽혀 있어 오늘날까지 하나를 다른 것에서 떼어낼 수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인다.
  - 헤겔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정당할 수 있으나, 실제 이루어진 비판들은 표적을 넘어 나갔다. 그 비판들은 발견과 발견자의 착오를 구분하지 못하고, 관철된 것과 허구를 구분하지 못했다. 헤겔철학의 공고하게 조직된 체계성이 아마 그것을 극도로 곤란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철학적 업적의 영구적인 가치는 구성과 체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연구를 통해 얻어진 것과 발견된 것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것들은 깨끗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객관적 정신의 발견은 헤겔 철학의 역사적인 덩어리에 있어서 초역사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철학자들 중에서도 그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다루는 문제들이 연구 활동 자체에 있어서 이미 체계를 폭파하는 것이다. … 헤겔의 체계는 무너졌지만, 헤겔에 의해 관찰된 사상은 남아있다.
  - 근본형상의 발견은 헤겔의 사유 자체에 있어 그의 후기에 전개된 객관적 정신의 이론보다 시간적으로 훨씬 앞선 일이다. 우리는 그 발견의 흔적을 초기 저작 속에까지 뒤로 추적해 갈 수 있다. … 앞에서 우리는 객관적 정신에 관한 헤겔의 후기 학설을 포함하고 있는 그의 역사철학의 12 테제를 작성하였다. 우리는 설정된 과제에 접근함에 있어 다른 모든 것에 앞서 이 12 테제에 대해 우리의 입장을 표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12 테제 중 한 개도 형식과 범위에 있어서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될 것이다. 그 12테제는 거기 있는 그대로는 어쨌든 관찰된 현상의 묘사는 아니다. 현상은 오히려 근본적으로 힘들여 얻어져야 하고 기술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노력에 의해서 비로소 우리의 입장은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점 한 점 철저하게 그리고 명확하게 실체형이상학을 들추어내어, 관찰된 것을 실체형이상학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 중요하므로, 우선 저 12테제에 같은 수의 반대 테제를 대립시키는 일을 회피할 수 없다.

=> 하르트만은 헤겔의 역사철학에 문제가 있다는 점은 인정하나, 헤겔이 상정한 객관적 정신의 개념을 발견한 것은 그의 철학체계와는 별개로 인정받아야할 점으로 본다. 따라서 18절에서 하르트만은 자신이 역사철학적 서론 3장에서 밝힌 헤겔 역사철학의 12가지 문제점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하고, 19절 부터는 헤겔에서 위대한 점인 객관적 정신의 개념을 개체와 공동체 정신의 관점에서 재구성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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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헤겔의 “실체형이상학(단락 3)”에서 이 ‘실체’는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경험적 현상이 아니다. 헤겔에서 실재는 정신적 물체이다. 헤겔이 보기에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 진짜로 있는 것(실재real <-> fiction)은 알고 보면 그 내용이 감각의 지각 대상이 아니라 정신적 실체geistige Substanz이다. 오직 사변적 이성에 드러날 뿐이다. 경험 과학, 사실 과학 하는 저급한 지성의 눈은 볼 수 없다. 적어도 철학적 사유를 하는 수준 높은 사변적 이성의 단계에서나 보인다.

하르트만은 헤겔의 공은 공대로 인정하고 헤겔이 오바한 것은 떨어내자고 제안한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쉽게 분리가 되겠나. 헤겔이 보기에 자연, 물질은 정신의 산물이다. 있는 그대로의 것[현상]과 내가 이해한 것[사변]이 분리될 수 있겠는가. 이에 하르트만은 양자 즉 현상과 사변을 떼어 놓는다. 그래서 하르트만은 헤겔 공부할 때 좋은 지침이 된다.

현대 심리철학은 인간의 정신을 실체로 보는 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고 지적한다. 실체는 다른 것의 도움을 받지 않는 독립적인 것을 뜻한다. 그런데 실체인 정신과 물질은 항상 붙어 있다. 따로 설명이 안 된다. 따라서 정신 실체와 물질 실체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정신적 사건과 물질적 사건으로 간주한다. 이것이 김재권의 탁월한 점이기도 하다. 기능주의 관점을 취한다.

어쨌든 헤겔에서 실재는 정신적 실체이다. 이것이 헤겔의 기본 명제이다.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헤겔 철학은 전부 휴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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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겔의 역사철학에 대한 12 테제(역사철학적 서론 제 3장)와 하르트만의 비판(18절 b, c, d)

  Hegel 1. 관념론의 이성형이상학은 헤겔에 있어서 정신형이상학으로 바뀐다. 역사 과정의 추진자(Träger, ‘부담자’로 번역되었다. 사전적 의미는 ‘짐을 나르는 사람’, ‘소유자’, ‘추진자’ 이다.)는 <객관적 정신>, 즉 개인을 초월한 고차의 존재자요 독자적 존재방식과 독자적 생명을 갖고 있는 보편적 정신실체이다. 개별적 정신들은 이것에 대하여 우연한 것처럼 관계한다. 그것들이 아니라 그것들 속에 있는 객관적 정신이 본래적인 것이고, 이것만이 중요한 것이다. 개체들은 객관적 정신의 본질의 불완전한 각인들에 지나지 않는다. 개체들은 결코 이 본질의 외부에서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이것에 의하여 추진되어 있다. 개체들은 눈이 어두워서 이 본질에서 벗어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이탈한 정신>은 죽은 정신이다.

  Hartmann 1. 객관적 정신은 개인들 배후에 있는 한 본질이 아니라 철두철미하게 다만 개인들 <속에 있는> 그 무엇이다. 비록 그들<로> 합성된 것이 아니고, 개별적 개인으로 다하여져 버리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실체와 우유성의 관계는 여기서는 어떤 방식으로도 적용될 수 없다. 객관적 정신만이 실체이고, 개인들이 우연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객관적 정신에서 본다면 개인들이 다만 불완전한 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은 진실이다. 또는 개인들이 구조적으로 객관적 정신에 의해 부담되어 있고, 객관적 정신의 외부에서는 결코 존립하지 않는다는 것은 진실이다. 또한 개인들이 인위적으로 객관적 정신으로부터 <분리>될 경우에는 개인들이 생존할 수 없다는 것도 진실이다. 그러나 오로지 객관적 정신만이 본래적인 것이고, 정신의 생활에 있어서 오로지 그것만이 간요하다고 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개개의 인격들은 오히려 그들대로 객관적 정신이 그들과 함께 공유하고 있지 않은 그러한 매우 특정한 종류의 우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인격성 그것이다. 그리고 객관적 정신은 내용적으로 인격적 개성의 전 충만을 형성하는 것도 아니요, 또한 개인들 없이 존립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개인적 정신과 객관적 정신 간에는 담지함과 담지되어 있음이 상호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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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객관적 정신만이 실체이고, 개인들이 우연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하르트만)” - 국역판에는 “객관적 정신이 실체가 아니고, 개인들이 우유성이 아니다”로 되어 있었음. 객관적 정신과 개인의 관계를 실체와 속성의 관계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컵(실체)과 컵의 속성(우연적)과 같은 관계로 공동정신과 개인의 관계를 보면 전체주의로 가는 존재론적 기초가 될 수 있다. 실체인 민족이 우선시되고 민족을 위하여 우연적 개인이 희생할 것을 강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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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egel 2. 그 배후에는 정신이 모든 것이라는 보편적 근본명제가 있다. 헤겔에 의하면 정신은 무정신자(無情神者), 즉 물질과 생물의 진리이기도 한데, 정신은 인간에 있어서 의식을 가지게 하고, 의식에 있어서 자기를 인식하지만, 이 의식은 완전하지 않다. 정신은 미지의 정신적 공동실체로서 개체들의 다수의 배후에 숨어 있다. 그리고 개체들은 이 공동실체에서 자라나며 그 속에 산다.

  Hartmann 2. 제시할 수 있는 것의 모든 한계를 전적으로 넘어선 저편에, 정신이 <일체(alles)>이다. 라는 테제가 배후에 숨겨진 채 서 있다. 정신은 일체도 아니요, 언제나 개체적인 것으로 있는 의식에 앞서 세계 안에 나타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정신은 그러므로 인식되지 않은 공동실체로서 다수 개인들의 배후에 서 있을 수도 없다. 정신은 존재적으로 2차적인 것이다.  정신은 세계가 포괄하는 것 중에서 가장 제약된 것이며, 단계 계열에 있어 최후의 것이다. 그것은 무정신적 존재의 계층들을 기초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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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정신이 <일체>이다.(하르트만)” - alles, 모든 것이 정신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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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egel 3. 보편적 정신실체는 세계과정의 부담자일 뿐 아니라, 그 인도자이기도 하다. 이성이 세계를 조종한다. 역사경로의 계획은 이성이 자기에게로 돌아옴이다.

  Hartmann 3. 객관적 정신은 훌륭한 역사과정의 담지자일 수 있다. 그러나 정신이 역사과정의 지휘자일수는 없다. 만약 역사 속에 이성이 존재한다면, 다만 개인들의 개성적인 이성이 존재할 뿐이다. 이성의 질적인 공통성은 이러한 사실을 변경시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공통적인 이성도 결코 인간을 넘어서는 이성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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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객관적 정신은 훌륭한 역사과정의 담지자일 수 있다.(하르트만)” 담지자는 역사를 짊어지고 가는 자이다. 이 때 인도자가 따로 있을 수도 있다.

우리 개개인은 이성적으로 사유한다. 사유 주체는 내 몸이 아니라 정신이다. 이 정신의 활동 원리가 이성이다. 이 때 이성으로 활동하는 정신은 개인의 정신이다. 한국정신이 그렇게 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한국정신이 움직인다고 치자. 그러면 한국정신을 누가 담지하고 가는가? 대통령? 그건 아니다. 한국정신은 공동정신으로서 우리 각각이 짊어지고 간다.

객관적 정신이 개인정신과 따로 떨어져 활동하지 않는다. 개인정신 활동 속에 녹아 들어가서 구현될 수밖에 없다. 객관적 정신이 스스로를 잘 인도한다면 공동체가 왜 망할까? 객관적 정신이 스스로의 인도자까지는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객관적 정신이 개인들에 의하여 인도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종종 삼천포로 빠진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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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egel 4. 이성의 본질은 자유이고, 역사의 궁극목적은 자유의 존재, 즉 자유의 자기실현이다. 역사과정은 그 속의 개인이 무엇을 추구하든, 자동적으로 이 궁극목적으로 향해 간다. 개인의 행위 속에도, 저도 모르는 사이에, 언제나 자기 자신에로 향하는 정신의 경향이 숨어 있다.

  Hartmann 4. 자유가 이성의 본질에 속하긴 하나, 이성이 자유만을 본질로 한다는 것은 가치청취(가치인식, 판단)의 사실에 직면하여 유지될 수 없다. 청취된 가치에 <대하여서>만 의지는 자유를 가질 뿐이고, 청취 자체에는 아무런 자유도 없다. … 인간이 역사 속에서 목적을 추구하지 않는 곳에서는 역사는 대체로 아무런 목적도 갖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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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헤겔에 따르면 이성은 실수할 수 없다. 모든 현실은 정신의 실현으로서 이성적이다. 그러면 세상이 편하다. 부정부패도 다 이성적이다. 하르트만은 정신이 자유를 향하여 간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제약을 둔다. 가치청취, 가치판단이 잘못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청취된 가치에 대해서만 자유롭다는 것이다. 가치를 잘못 인식하면 그것을 실현시키는 자유가 이성적인 자유라고 보기 힘들다. 따라서 하르트만에 따르면 정신은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기독교, 헤겔은 한 통속이다. 우주 전체에 궁극 목적이 있다. 인간의 삶도 궁극목적을 향해 가게 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길게 보면 어쩔 수 없이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보면 비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진리는 전체’요, 마지막에 좋으면 다 좋다는 논리이다. 헤겔에서 절대정신이 절대지에 이르러 절대 자유에 도달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dynamis(잠재태)가 energeia(현실태)로, entelecheia(완전한 현실태)로 실현되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에서는 천국의 지상도래라고 하겠다.

‘가치 청취’ - 청취Vernehmen에서 이성Vernunft이 나왔다. 있는 것이 아닌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수동적이지 않고 능동적인 것이다. 우리는 가치를 받아들이는데, 거기에는 제약이 있다. 그래서 완전한 자유의 실현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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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egel 5. 세계 역사는 그러므로 <자유의식의 진보> 이다. 이것은 세계 역사에 내재하는 근본 법칙이다. 정신은 <그 자체에 있어서 자유로운 것>이지만, 자유는 그것을 가진 자가 그것을 가졌다는 것을 아는 때에만, <현실적>이다. 그렇지 않을 때 정신은 오히려 부자유일 것이다.

  Hartmann 5. 역사 속에 진전하는 자유의 의식이 있긴 하지만, <자유의 의식에 있어서의 진보> 라고 하는 것이 역사의 내면적 근본법칙은 아니다. … 역사 속에 진보가 있는 한, 진보는 자유의 진보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적으로 다양하고 다차원적이다. 이와 반대로 자유는 자유의 의식 없이는 결단코 현실적이 아니라는 것이 진실이다. … 단지 결단 속에만 자유가 존재하며, 의식적인 정신만이 결단을 내릴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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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헤겔은 역사를 ‘자유 의식의 진보’로 규정한다. 하르트만은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사유의식의 확장만이 더 진전 / 덜 진전된 역사를 결정하는 근거는 아니다. 다른 요소도 보아야 한다. 그리고 자유에 대한 의식은 객관적 정신이 아니라 개인정신이 하는 것이다.

헤겔은 자유를 의식하고 그 의식을 강화, 심화시키는 객관적 정신이 역사를 진전시킨다고 주장한다. 하르트만은 자유의 의식은 개인정신이 하는 것이요, 공동정신 자체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헤겔이 위대한 철학자임에는 틀림없다. 역사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광범하게 논한 이가 이전에는 없었다.

헤겔에서 인간이 점점 더 자유로워지는 경우는 두 가지이다; 1) 자연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경우(자연)와 2) 다른 인격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경우(사회). 자유로워졌어도 이를 의식하지 않으면 이는 자유로워진 것이 아니다. 자유에 대한 의식이 확장되어야 역사가 발전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에 하르트만은 헤겔의 주장은 옳으나, 다만 자유를 의식하는 자는 개개인이지 공동정신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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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egel 6. 그렇지만 모든 중요성이 최종단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피히테의 역사상과 헤겔의 역사상이 구별되는 주요한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역사에 있어서는 과정 자체가 본질적인 것이니, 각 단계는 되풀이 되지 않는 정신의 독특한 형태이다. 과정은 결과 속에 지양될 뿐이니, 각 민족의 역사적 정신유산은 그 민족들에 있어서의 진리의 보존이다.

  Hartmann 6. 역사에 있어서 과정이 전적으로 그 결과 속에 <지양되어> 버린다는 명제는 정당화될 수가 없다. 그와 같이 지양되어 있다는 것은, 정신의 모든 본질적인 성과가 끝까지 보존되고, 더 이상의 진보에 있어서 그 구성요소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테제는 진보와 목표가 의심스러워지는 순간에는 무너진다. 역사적 경험은 민족에서 민족에로의 정신의 계승이 전적으로 틈이 있는 계승이라는 것, 그리고 항상 가치충만한 것과 중요한 것이 멸망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과정과 결과는 객관적 정신에서는 그 규모의 대소를 막론하고 결코 합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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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헤겔에 따르면 앞선 상태가 뒤따라오는 상태, 단계에 전부 담긴다. 이에 대해 하르트만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고 지적한다. 앞선 것을 다 버리고 새 것을 갖다 놓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헤겔식으로 말하면 실패의 역사는 있을 수 없다. 더 나은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진보한다. 목적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이에 대해 하르트만은 전적으로 옳지는 않다고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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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egel 7. 이렇게 이해된 과정에 있어선 과연 하나의 통일적인 <세계정신>이 역사적 형태들의 다수를 관통하여 진행한다. 그러나 세계정신은 이 다수의 형태들에 있어서 전개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다수의 <민족정신>으로 분열하게 된다. 그래서 세계정신은 역사적 정신의 서로 다른 <원리들> 또는 근본이념으로 나타나게 된다. 각 민족정신은 각각 자기 고유의 <원리>를 가지고 있어, 이것을 실현하는 것이 세계에 있어서의 그 과제로 된다.

  Hartmann 7. 다수의 역사적 형태들을 관통하는 통일적인 <세계정신>으로서의 객관적 정신에 대한 견해도 정당화될 수 없다. … 우리가 역사적으로 알고 있는 것은 단지 상대적 연속성을 가진 공동정신의 삶뿐이며, 이 삶은 여러 갈래로 진행하고 형태변화가 곧 그 삶의 본질이다. … 우리는 민족정신들의 <과제>에 대하여 기껏해야 그것들이 그 속에 입장하는 그때마다의 주어진 세계정세 속에서 그것들 각자에게 전체역사에 있어서의 일정한 역할이 떨어진다고 비유적으로 말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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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하르트만도 공동정신을 인정한다. 공동정신도 시간, 공간적 제약 속에 있다. 이를테면 한국정신은 언젠가 소멸할 수도 있고 그 범위가 제주도로 줄어들 수도 있다. 헤겔식의 절대정신, 세계정신은 관념적인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그러나 하르트만은 각 문화공동체의 공동정신은 인정한다.

하르트만은 충분한 이해 가운데 헤겔 철학을 요약, 해석, 비판하였다. [[독일 관념론 철학]]에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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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egel 8. 이러한 <원리>의 자기실현은 한 민족의 역사적 생활에 있어서 원리에 대한 의식에 훨씬 앞서서 시작된다. 원리는 시대의 특정한 민족집단 속에서 어렴풋이 느껴진 내면적․운명적 과제로서 작용한다.

  Hartmann 8. 한 민족의 삶가운데는, 그것이 의식적으로 파악되고 목표에 꼭 들어맞게 추구되기 이전에는 어두운 충동으로서 작용하고 있는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내면적 <규정>으로서 한 민족에게 지정되어 있을 한 <원리>의 자기실현으로서 이해될 수는 없다. 실제로 형성되어 나오는 것은 민족정신의 특성이다. 이것은 충분히 원리의 성격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러나 민족정신의 특성이라는 것은 한 민족에게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역사적으로 생겨나며, 가장 이질적인 영향들의 이음새 속에서 생겨난다. 그러나 살아 있는 정신은 그 이음새를 꿰뚫어 보지 못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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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헤겔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를테면 한국정신이 있는데 세계정신의 원리를 모르지만 어렴풋이 세계정신의 원리로서 활동한다는 것이다. 이 세계정신은 구체적인 여러 공동체의 원리가 된다. 하르트만은 이 입장을 거부한다. 민족의 활동에 따라 민족정신이 특징 지워진다고 주장한다. ‘mission’을 받는 것이 아니다.

“민족정신의 특성이라는 것은 한 민족에게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역사적으로 생겨나며, 가장 이질적인 영향들의 이음새 속에서 생겨난다.(하르트만)” 이를 공동정신과 개인정신의 관계에도 적용할 수 있다. 공동정신이 개인정신에게 특정 원리를 지정해주는 것이 아니다. 이음새 정도 는 할 수 있다. ‘이질적인 것’들이 세계사를 만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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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egel 9. 민족정신의 발전을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로 나누는 시기구분은 이것과 상응한다. 어떤 민족의 청년기, 즉 강인한 감투의 시기는 헤겔에 의하면 그 역사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시대이다. 개체는 아직 공동정신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자신을 전체의 부분으로서 느낄 뿐이다. 민족이 성숙하여 노년기로 들어갈수록 창조적 활동은 점점 과실의 향유로 바뀌어진다. 그러나 향락에 있어서 힘은 마비되고, 개체가 대두하여 자기를 자립자로 느끼며, 자신을 전체에서 분리시킨다. 이것이 해체의 시작이다.

  Hartmann 9. 민족들의 삶가운데 <청년기-성숙기-노년기>의 의미에 있어서의 시대상속이라는 것이 있다는 데 대해서 아무도 반론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 공동정신은 초기단계에 있어선 개체를 자기 곁에 꼭 붙들어둘 수 있는 힘을 보이지만, 후기단계에 있어선 이완한다는 것도 승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발전은 사실상 객관적 정신의 발전이다. 그러나 단지 정신만의 발전인 것만은 아니다. 그 배후에 생명적인 종류의 더 기본적인 발전이 있고, 이 발전은 한 민족의 생명력이 천천히 소모되어 버리는 것을 뜻한다. 정신은 그 생명력을 먹고 살아가며, 결국에 가서는 그것을 다 소비해 버린다.
=> 이것은 헤겔에 대한 단순한 보충을 통한 동의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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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어떤 민족의 청년기, 즉 강인한 감투의 시기는 헤겔에 의하면 그 역사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시대이다.(헤겔)” 개인이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활동하기 때문이다.

“민족이 성숙하여 노년기로 들어갈수록 창조적 활동은 점점 과실의 향유로 바뀌어진다.(헤겔)” - 젊어서 벌어 놓은 것을 늙어서 퍼먹고 앉아 있다는 뜻이다.

하르트만에 따르면 객관적 정신의 발전은 “그러나 단지 정신만의 발전인 것만은 아니다.(하르트만)” 존재에는 네 가지 층위(Geist / seele / Leben / Materie)가 있다. 정신의 발전만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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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egel 10. 정신이 자기를 실현하는데 쓰이는 수단은 개체들의 사적 정열이다. 이성은 그것을 이용한다. 이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개인적 목적을 추구함에 있어서 언제나 동시에 어떤 다른 것을 영위하게끔 하고 그리하여 결국 공통한 원리를 실현하도록 돕는다. 이것은 역사에 있어서의 <이성의 계략>이다. 헤겔에 의하면 이성은 이런 식으로 역사를 간섭한다. 헤겔에 있어서 자유의 독특한 위치는 이것과 연관이 있다. 인간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원리에 봉사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도덕성은 이 원리를 알기도 하면서 자유로운 자기 규정에서 원리를 위하여 행위하는 데서 성립하는 것이다.

  Hartmann 10. 세계과정이 이성의 목적을 지향하고 있지도 않고, 또는 이성에 의해 주재되고 있지도 않다면, 이성이 역사 속에서 그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개체들의 사적인 정열을 이용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에 있어서의 이성의 계략에 대해서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중요한 점은, 공동체의 관심방향이 개체들의 관심방향과 평행선을 긋는 그러한 공동체형식만이 역사적으로 오래 가고,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개개인의 <정열>이 공통적인 일을 행하면서도 그것을 목적으로 하지도 않고, 심지어 그가 그것을 행한다는 것을 알지도 않고서 그것을 행한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물론 결과적으론 헤겔이 말한 바와 같은 계략에 속아 넘어간 꼴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그것도 결과에 있어서만 그렇고 실제의 근본관계에 있어서는 그렇지가 않다. 왜냐하면 여기엔 아무런 이성도 활동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 즉, 개체는 자신의 만족만을 추구하지만, 그럼으로써 종의 생명에 봉사한다. 그러므로 이 법칙은 결코 특수하게 정신적인 법칙이 아니다. 종의 생명도 역사적 정신도 그렇다고 해서 선견의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양자는 단순히 개체가 속해 있는 전체 속에 개체가 편입되어 있다는, 전체와 개체 간의 관계의 형식을 가지고 있을 따름이다.
  개체들의 <도덕성>이란 것이 단지 의식적인 편입에서 성립하는데 불과한가 어떤가는 이 기반 위에서는 결정될 수 없다. 그러나 도덕성이 인격의 자유를 기초로 하고 있는 한, 도덕성은 인격을 넘어서 지배하는 하나의 이성의 상정을 배제한다. 그러므로 도덕성은 어쨌든, 그 정신적 체계가 개개인을 속여서 행위하도록 하는 그러한 공동체에서는 성립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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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정신이 자기를 실현하는데 쓰이는 수단은 개체들의 사적 정열이다.(헤겔)” “사적 정열”은 ‘개인적 정열’을 뜻한다. 한국정신이 인간 정주영으로 하여금 미쳐 날뛰게 만들었다는 예를 들 수 있겠다.

“이성의 계략(헤겔)”, 즉 이성은 꾀를 부려 개인을 꼭두각시처럼 다룬다.

공동체의 정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개개인이 모여 활동하다보면 공동체의 정신이 생긴다. 특히 도덕성 문제를 보면 확연하다.

중등 도덕 교육은 ‘개인의 인격은 공동정신의 실현을 위하여 봉사한다’는 전제를 받아들이도록 유도한다. 이 때 공동정신이 원리, 개인정신이 수단이다. 마찬가지로 세계정신이 원리이고 각 시대의 민족 공동체는 수단이다.


하르트만은 [[Ethik]]에서 칸트를 비판한다. 칸트의 논리대로 따라가면, 도덕법칙이 완전히 실현되면 인간에게 자유는 없어진다. 그런데 인간에게 자유가 없어지면 도덕성의 존립 기반 자체가 없어진다. 이에 하르트만은 도덕법칙은 이론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가치가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도덕성은 인격의 자유를 기초로 한다. 우리가 자유롭다고 하지 않으면 도덕성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자유를 기초로 하여 도덕성이 성립하는 한, 인격을 완전히 통제하는 이성의 원리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가끔 자유롭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이럴 때 치고 들어오는 자가 헤겔이다. 의욕은 나는데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침침한 사람들에게 어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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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egel 11. 대체로 말해서 개인도 군중도 그 욕구와 노력에 있어서 참으로 소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역사에 있어서의 위대한 모든 것은 그것이 의식 안으로 들어와 인간의 자유로운 전력투구로서 추구되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중이 참으로 현실적으로 <하고자 하는>것이 무엇인지를 그들에게 말하여 주는 것이 중요하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개인이 해야 할 과업은 바로 여기에 있다. 역사상의 위인이란 그 자신의 이념을 가지고 민중 앞에 나타나 그들이 <하고자 하지도> 않는 것으로 몰아가는 그런 인물이 아니라, 그들이 <정말로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민중에게 말하여 줄 줄 아는 인물이다. 사람은 그가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또한 알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개인은 공통한 정신의 의식으로 자기를 끌어올림으로써 역사적으로 위대한 것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개인은 공통정신에게 그 대자존재(Fürsichsein)을 부여한다.

  Hartmann 11. 의식적으로 뚜렷하게 그 모습이 부각되지 않은 채 공동정신을 앞으로 몰아대는 하나의 불분명한(하기락: 어두운) 역사적 의욕(하기락: 원망)이 존재한다는 것은 부인될 수 없다. 이 소망(하기락: 소망)을 뚜렷이 부각시키는 각인을 발견하고 그것을 인식하여 다중에게 알리는 것은 실로 위대한 개인의 임무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개인에게 그 이외 아무런 다른 역할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 개인적 정신은 단지 객관적 정신의 대변자로서만 역사적으로 의의있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 정신은 객관적 정신에 이반함에서도 의의있는 것이다. … 개개인은 <객관적 정신과 나란히 하여> 걸어갈 수가 없고, 그는 항상 객관적 정신 속에 뿌리박힌 채로 남아있다. 그러나 그가 넘어나가서 잡으려고 하는 바의 그것은 그의 뿌리박힘과는 별개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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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개인은 공동정신을 구현하는 것으로서 그의 모든 정신적 활동을 다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뜻이다.

위대한 사람은 객관정신을 읽어내는 사람이다. 그가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 그 점에서 헤겔의 주장은 옳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공동정신을 인식하고 이를 알려주는 자가 위대하다. 개개인들은 공동정신을 알고 행할 수도 있고, 모르고서 공동정신의 꼭두각시 노릇을 할 수도 있다. 어쨌든 헤겔식으로 말하자면 개인정신은 공동정신 실현을 위한 수단이다. 그런데 꼭 그렇지는 않다. 개인정신이 공동정신을 벗어나기도 한다. 그렇다고 단순 이탈이 아니다. 넘어선다. 한국 사람은 한국 공동정신에 뿌리박혀 있으나, 벗어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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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egel 12. 그러므로 무리한 모든 세계개선은 환상이다. 실제 역사에는 오직 객관적 정신의 연속적이고 내면적으로 필연적인 진행만이 있을 뿐이다. 이 진행을 앞지른다는 것은 기만이다. … 객관적 정신의 진행에 있어서 되어지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해서 그 때마다의 역사적 전진에 상응하는 것이 참된 것이다. …

  Hartmann 12. 세계심판이란 매혹적이고 낙관주의적인 사상은 아마 조금도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역사는 공정한 법정이 아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순전히 성과에 따라 판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가장 좋은 것은 대체로 보존되고, 보다 열등한 것은 역사의 쓰레기더미 속에 가라앉게 된다고 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많은 의심스러운 것이 시대의 변천 속에서도 놀라운 강인성을 가지고 유지되며, 많은 위대하고 훌륭한 것이 충격적일 만큼 덧없이 사라진다. …
  세상을 바꾸려는 자의 개량의지는 가소로운 것일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이상형식이 호사가적인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때마다 존재하는 것에 대립하여 마땅히 있어야 할 것에 대한, 객관적 정신의 깊이에서 태어난 의식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식은 그것이 자기 자신을 역사적으로 관철시킬 수 있는 지반을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그의 내면적인 진리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
  이에 반하여 역사적 개조, 경신, 새로운 창조는 기존의 것에서 다만 유기적으로만 생겨난다는 것은 진실이다. … 이 법칙은 시대정신이 다만 급격한 변동만을 감지하는 경우에도 깨뜨려지지 않는다. 대립 그 자체는 언제든지 직접 잡을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립은 공통한 것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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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역사의 법정에 대하여 헤겔은 있으면 하는 소망을 강력하게 피력한다. 하르트만은 없음을 인정하라고 주장한다. 개개인의 일, 활동은 자기가 알아서 하는 것이다. 공동체도 그렇다. 헤겔처럼 임의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무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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