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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기철 ( http://dieBildung.net ) Date : 2008/05/16  Hit : 6170  Recommend : 741   
   Download #1 : 공동정신_31절발제.pdf (166.2 KB), Download : 98
 [공동정신] 10주차 - 31절
08.05.16. (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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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객관적 정신이 어떻게 개인을 넘어서 지속적으로 존재하는지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객관적 정신은 개개인의 정신을 넘어서지만 그렇다고 개개인의 정신으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지는 않는다. 하르트만은 개개인의 정신에 담지 되어 있는 객관적 정신을 역사의 주체로 본다. 하르트만이 헤겔로부터 배운 부분이다. 하르트만은 헤겔이 최초로 이를 이론화하였다고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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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1절 역사과정과 이념 (발표자 박주영)

a. 전체성과 전체성의 과정
  객관적 정신의 삶은 절대로 환원될 수 없는 자율적인, 고유한 내면적 역동성을 가진 독자적 삶으로 경험될 수 있다. 이 모든 것에 있어서 오직 이 역동성의 내면만은, 과정 속에 들어와 작용하는 외적 성질의 무수한 요인들이 잘 알려져 있는 반면에, 어디까지나 포착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이 외적인 것에 걸려 있는 고찰에게, 역사적 정신의 삶의 고유법칙성을 오인하는 동기를 매번 주곤 한다.
  이러한 착오의 동기에 있어 원칙적인 과오는 사회학적-원자론적 견해에 걸려 있다. 왜냐하면 문제가 되고 있는 과정은, 설사 그것이 개인의 생활 속에 표시된다 하더라도, 사회적 원자들 즉 개인들한테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공통적 정신의 삶의 전체성한테서 생기고, 또 그 전체성한테서 경과하기 때문이다. 공동체와 공동정신이 거기 있기도 전에 개체가 존재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공동정신은 언제나 이미 거기 존재하며, 그것의 전하여짐은 그것의 존속과 역사적 존재의 형식이다.
  우리는 여기서 종래의 모든 존재론적 편견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언제나 다음과 같은 반대를 들 수 있다. 즉 어떻게 해서 하나의 정신적으로 공통적인 것이, 하나의 존립하는 공동체형식조차가 현존재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마치 현존재가 보여짐에 의존하고 있기나 하듯이 말이다. 현존재가 일반적으로 그것의 파악되어 있음(Erfassrsein)과는 관계없이 존립한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야말로 현존재의 존재적(ontische)의미이다. 그것은 아마 파악함을 허용은 하겠지만, 그러나 요구하지는 않는다.
  잡을 수 있는 것, 실체적 성질을 가진 것만이, 즉 요소만이 현존재를 갖는다고 하는 실증주의의 편견을 우리는 철저하게 일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잡을 수 없는 것, 복합적인 것, 요소들에 기초를 두고 있는 보다 높은 서열의 전체성도 꼭 마찬가지로 현존재를 갖고 있다. 그리고 전체성이 하나의 담지된, 초실존하는 전체성인 한에서(그리고 모든 참된 전체성은 이러한 전체성이며, 유기적 전체성도 벌써 그렇다), 우리는 또한 다음과 같이 부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초실존은 개체들의 공동체(생명적 공동체이거나 정신적 공동체거나를 막론하고)의 모든 영역들에 있어서도 자존과 똑 같이 기본적이다. 개체는 전체 이전에 아무데도 존재하지 않는다. 즉 동물의 견본이 종 이전에, 개인이 개인들의 공존 이전에, 주관적 정신이 객관적 정신 이전에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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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자존과 똑 같이 기본적이다”(단락 4) - ‘기체와 똑 같이 기초적이다’로 고칠 것.

어떤 것이 있으려면 그 밑에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 손동현이 손동현이려면 그 무언가가 손동현의 기초로 있어야 한다. 즉 그 자신은 미확정의 것이면서 어떤 사물이 바로 그것이 될 수 있도록 해주는 기초를 Subsistenz기체라고 한다. 이 때 어떤 사물의 바로 그것임이 Substanz실체이다. 기체는 실체를 실체이게 해주는 추상적 개념적 장치이다.

“동물의 견본Exemplar” - ‘동물의 개체’로 고칠 것.


객관적 정신의 삶에 있어서 “내면적 역동성”(단락 1)과 “외적 성질”(단락 1)이 서로 대립한다. 외적 성질은 잘 파악되지만 외적 성질만을 가지고 객관적 정신의 삶의 내면적 역동성을 파악할 수는 없다. “사회학적 ... 견해”(단락 2)로써 다시 말해 사회를 실증 과학적 방법론으로써 파악하면 내면적 역동성을 잘 파악할 수 없다. 분석 철학 수업에서 배운 ‘분석적 환원’을 떠올려보자.

분석적 환원을 통하여 뭔가가 손에 잡혀야 그것이 의미를 갖는다. 이를테면 ‘영국이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다’는 명제를 보자. 이것처럼 허황된 말이 없다. ‘영국’과 ‘독일’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이들이 무엇인지 달려들어 보면 이에 해당하는 존재적, 실질적 내용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정말 없는가? 있다. 그렇다면 손에 잡히는 것으로 환원하자. ‘영국 수상 처칠이 의회에서 이런저런 연설을 하였다’가 이에 손에 잡히는 경험적 fact이다. 이렇게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로 환원시키고 그 결과 환원이 되지 않으면 가짜이다. 실질적 존재성이 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용의 품에서 단군이 태어났다’의 경우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 존재적으로 무의미non-sense하다. 이것이 실증주의적 태도이다. 이 때 positiveness는 ‘감각적 지각에 주어지는 사실을 갖는다’는 뜻이다.

‘영국이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다’는 처칠의 연설이라는 감각 지각으로 환원될 수 있다. 알갱이, 내용이 있는 것에 맞닿는다. 존재적 중량을 갖는다. 그런데 ‘용의 품에서 단군이 태어났다’에서는 남는 것이 없다. 존재적으로 무의미하다. 그러나 분석적 환원만이 전부가 아니다. “잡을 수 있는 것, 실체적 성질을 가진 것만이, 즉 요소만이 현존재를 갖는다고 하는 실증주의의 편견을 우리는 철저하게 일소하지 않으면 안 된다.”(단락 4)

공동정신의 요소는 개인적 정신들로 구성된다. 이에 개인적 정신으로 공동정신을 환원시키려는 것이 실증주의의 입장이다. 이 입장을 넘어서야 한다. 오늘날 영어권의 철학에서는 ‘정신Geist’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으려고 한다. 독일어권에서나 Geist / Seele가 유의미한 용어로 쓰인다. 영어권에서 이런 용어들은 종교에서나 쓰인다. 이를테면 헤겔의 [[정신현상학Phaenomenologie des Geistes]]는 [[Phenomenology of Spirit]](Miller, Yovel 등)외에 [[Phenomenology of Mind]](Baillie)로도 번역되었다. 영어권의 실증주의적, 분석적 태도와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영어권에서 ‘spirit’은 철학적 개념어가 아니다.

하르트만은 [객관적 정신의 내면적 역동성을 파악하는 방법으로] 현상학적 방법을 제시한다. 현상학적 방법은 사태를 직관하는 인간의 능력에 의거한다. 딜타이는 이해를 ‘감각적 지각에 주어지는 것을 뚫고 들어가서 주어지지 않는 것을 파악하는 과정’으로 정의한다. 하이데거는 유리창을 매우 깨끗이 닦아 투명하더라도 창틀을 보면 거기에 창이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현상학적 방법에 따른 기술은 주어진 현상을 감각적 지각을 뛰어 넘는 우리의 순수, 선험적 의식에 주어지는 대로 기술하는 것을 의미한다.

막스 셸러는 ‘ideiieren’즉 ‘Idee를 본다’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ideiieren’은 지능을 가졌으나 본질직관은 못하는 동물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경우에도 어린 아이가 아니라 수학적 사고 즉 양적, 추상적 사고 정도는 할 수 있는 연후에나 가능하다. 철학은 질적, 추상적 사고를 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사회과학은 실증 과학적 탐구를 수행한다. 인간의 삶을 실증 과학적 탐구로써 모두 파악할 수 있을까? No라고 대답한다면 인문학이 필요할 것이고, Yes라고 대답한다면 인문학이 불필요할 것이다. 현대의 학문 추세에서는 Yes의 경향이 강하다.


공동정신이 담겨 있는 개개인의 삶은 “공통적 정신의 삶의 전체성한테서 생”(단락 2)긴다. 개인적 정신 - 객관적 정신 - 객체화된 정신 중 두 정신이 관계할 때 다른 한 정신이 mediate한다는 점을 상기하기 바란다. 개인적 정신이 있어야 공동정신이 있고, 공동정신의 전체성이 있어야 그 속에 개인적 정신이 있다. 이에 공동체로서의 공동정신이 기체로서 역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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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형식을 형성하는 과정으로서의 정신의 삶
  정신의 영역에 있어서의 전체성은 단순한 공존이거나, 또한 단순히 동질적인 형성태도 아니다. 그것은 끊이지 않는 형성과정 속에 용해되어서만 존재하며, 형식의 부단한 해체와 구성으로서만 존재한다. 모든 생명은 형식을 이루는 과정이며, 유기적 생명도 그렇다. 개체도 종도 순전히 정태적인 형식을 알지 못한다. 변화는 매우 다양한 템포로만 일어난다. 그러나 정신의 삶은 또 전혀 다른 척도와 차원에 있어 가동적이다. 그것은 형식들을 스스로 해체하여 새것으로 대체하고, 그 형식들로 되돌아가거나 아니면 영원히 버리기도 한다. 이 정신의 삶의 과정은 유기적인 생명과정과는 다른, 훨씬 높은 의미에서 형식을 형성하는 과정이다.
  유기체의 왕국에서는 개체들의 재생산을 통해 같은 형식의 재형성이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정신적 전체성의 과정은 이와는 다르다. 형식은 유전되지 않는다. 도리어 전하여짐에 있어 그것은 이미 변화에 굴복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세대는 그의 것을 가져 오고, 전하여진 것은 새로운 토양 위에 떨어지거니와, 이 새로운 토양은 역시 똑 같이 공통적이면서 그러나 하나의 다른 토양인 것이다.
  개개인은 그의 특질을 가지고서 본질적으로 이 과정에 관여하고 있다. 정신적 형식형성의 역사적 과정은 개개인의 의식과 행위를 그 자신 속에 편입시킨다. 개인적 자율성, 목표설정, 의욕과 의욕된 것을 위한 전력 등의 요소가 언제나 과정의 움직이는 힘들 사이에 끼어들어 있다. 그리하여 이 요소를 통해 과정은 비단 움직여지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항상 움직이는(타동적인)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이것이 과정의 생명의 역동성을, 정신을 안 가진 존재가 알지 못하는 그러한 비길 데 없는 역동성으로 만드는 바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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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전력”(단락 3) - ‘질력’ 혹은 ‘노력’으로 고칠 것.

정신의 “형식은 유전되지 않는다”(단락 2). 25절에서 생물학적 종-개체와 공동정신-개인정신의 차이점을 보았다. 생물학적 종은 개체에로 유전Vererbung되고 공동정신은 개인정신에로 전승Tradition된다. 양자의 관계는 유사해보이나 과정의 양상은 전혀 다르다. 생물학적 차원에서는 종이 전체성으로서 정해진 유전적 메카니즘을 통하여 유전된다. 구조가 정해져 있고 그에 따라 과정이 진행된다. 인간의 정신생활에서는 정해진 것이 없다. 정신의 형식은 유전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자연사회와는 다른 인간 문화사의 특수성이다.

정신의 형식을 해체하고 형성하고 바꾸는 것은 역사의 과정이요 인간의 정신적 삶이다. 생물 종도 형식을 바꾼다. 진화나 퇴화가 그것이다. 그러나 쉽게 바뀌지 않는다. 오랜 기간이 걸린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는 정해진 형식이 없다. 스스로 의도를 가지고 만들기도 하고, 공동체적 삶 속에서 개개인의 의도된 의식과 상관없이 형성되거나 쇠퇴하기도 한다. 그 과정이 역사이다.

인간은 형식을 형성 한다Form bilden. 인간의 삶은 미정 형식에 그 특징이 있다. 역사에서 법칙을 찾고자 하는 철학자도 있다. 실증 과학에 오염된 역사가들이다. 법칙을 찾아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한 문화가 망할 때 공통된 수순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를 법칙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역사의 교훈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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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정신을)움직이는 이념들과 정신의 방향의식
  만약 개개인의 이니시어티브를 고집하고, 그리고 이것이 다양한 가능적인 방향들에 성립한다면, 총계학의 법칙에 따라 모든 것은 전체효과에 있어 다시 평준화하게 되고, 전체의 정신적 형식은 역사적으로 정지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그때마다의 공통한 선호방향, 흐름 내지 경향 등이 현존하고 있다는데 근거하고 있다.
  그러한 경향들이 의식되게 되고 알려지게 되는 경우에, 이러한 일은 물론 개개인을 통해 일어난다. 그러나 진정한 근원은 정신의 공통적인 변화 속에 있다. 이러한 흐름들은 그럴 때 개개인의 이니시어티브와 전력투구를 잡아채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잡아챔은 많은 영역에서 일어나는 과정으로, 이것은 의식의 충분한 빛 속에서 직접 추적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에는 목표, 규범, 평가 또는 이념 등의 형식에 있어서의 경향의 내용적인 형성이 속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의 삶을 그가 열망할 수 있는 이념들 아래 두는 경향을 언제나 지니고 있다. 인간의 본질에 있어서의 이러한 근본경향은 자신의 인생의 의미부여와 의미성취에의 욕구와 동일하다. 이념들은 이러한 의미에서 정신적 전체과정의 역동성에 있어서의 방향의식이다. 개개인의 이니시어티브는 전체운동의 불가결한 요인이며, 개인들의 공통적인 방향의식으로서의 이념은 객관적 정신의 삶의 과정에 있어서의 탁월한 원동력인 것이다.
  이념은 개인적인 이니시어티브와 개인적인 생활목표에 대하여, 그것이 인간들을 결합하고, 인간들에게 공통적이라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념의 법칙은 이념이 사람들 사이에 퍼지고, 모든 힘들을 잡아채고, 전체과정에 있어서의 원동력으로까지 성장하곤 함의 법칙이다. 그래서 이념은 다른 규모의 힘이요, 역사를 형성하는 창조적인 힘이다. 이념의 출현의 동기가 전적으로 정신외적인 요인들 가운데 있는 그러한 경우에도 이념은 그러한 힘이다.
  이념에겐 역사과정 속에 나타는 목적론적 지향성의 기미(氣味)가 걸려 있다. 이 지향성은 역사에 있어서 확실히 전능적이 아니며, 그것은 단지 다른 힘들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때문에 역사에 있어서의 목적론적 지향성의 현존을 근거로 해서, 오로지 이념에만 맞추어진 역사과정의 목적론적인 상을 구성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다.
  그러나 이념들의 힘이 전체과정 속에 역사적-정신적 실사성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아마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념들은 역사적 전체과정을 추진하는 힘들 중에서 하나의 중요한 성분을 형성한다. 그리고 이념 상호간의 투쟁이건, 아니면 다른 종류의 세력에 대항하는 이념의 투쟁이건 간에, 역시 똑 같이 실사적이다. 그러한 정신적 투쟁은 이념이 이 투쟁에 있어서 이기려고 분투하고, 침투해 들어가고, 자기를 관철하곤 함에 있어서와 같이 이념이 마비되고, 제압되고, 굴복되곤 함에 있어서도 역사적으로 추적될 수 있다.
  이념들은 객관적 정신의 삶에 있어서의 그러한 힘인 바, 이 힘으로 해서 객관적 정신의 자율성과 자발성이(모든 의존성에도 불구하고)명료하게 파악되는 것이다. 이념들은 규모가 큰 정신의 자발적인 형태형성의 기미(氣味)에 대한 증거요, 모든 역사적 형성과 개조의 기초가 되는, 다양한 담지하는 힘들의 한가운데서 정신이 자기를 형성하고 실현함의 가시적인 요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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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총계학” - ‘통계학’으로 고칠 것.

“만약 개개인의 이니시어티브를 고집하고, 그리고 이것이 다양한 가능적인 방향들에 성립한다면, 통계학의 법칙에 따라 모든 것은 전체효과에 있어 다시 평준화하게 되고, 전체의 정신적 형식은 역사적으로 정지하게 될 것이다.” - 개개인의 활동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면, 다시 말해 개개인의 활동이 공동정신을 구성하는 전부요 개개인의 총합이 곧 공동체의 삶이라고 한다면, 공동정신 역시 통계학대로 돌아가야 하고 그러면 공동정신의 형식은 변화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통계학자들은 국민 소득이 2만 불을 돌파하면 일어나는 현상들을 말하지만, 한국사회의 경우 그 통계대로 들어맞지는 않는다. 한국사회의 경우는 또 다르기 때문이다.

통계학적 요소는 같아도 정신이 움직이는 형식은 다르다. 형성되고 해체되고 변화한다. Formbildung에는 공식이 없다. 그러면 어떻게 파악해야 할까? 그러니 현상학적 방법으로 파악해야 한다. 실증 과학적으로는 정신의 자기 형성을 측정해볼 수 없다.

“개개인의 이니시어티브”(단락 2)와 ‘전체의 흐름’이 대립한다. 공동체 전체가 보여주는 어떤 과정은, 공동 정신의 “이러한 흐름들은 그럴 때 개개인의 이니시어티브와 전력투구를 잡아”(단락 2) 챈다. 어떤 시대에는 개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실현되지 않는다. 당대의 공동체가 구현하고자하는 공동정신에 맞아떨어지지 않을 때 그러하다. 개개인의 이니시어티브와 전력투구를 잡아채는 ‘이러한 흐름’을 헤겔식으로 말한다면 List der Vernunft이성의 간교한 계략일 것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을 탐욕을 추구하는 존재로 간주하여 인간의 욕구를 잘 이용하는 시스템이다. 공산주의는 인간을 탐욕을 절제할 수 있는 도덕적 존재로 간주한다. 그런데 인간의 욕구가 없으면 공동체 삶의 원동력이 없다. 그렇다고 인간의 욕구만 추구하면 약육강식의 난장판이 된다. 따라서 국가라는 공동체가 그 조정역할을 섬세하고도 강력하게 해야 한다.


“이념에겐 역사과정 속에 나타나는 목적론적 지향성의 기미(氣味)가 걸려 있다(단락 5).” 없잖아 있다. 이에 대해 하르트만은 찬동한다. 전적으로? 아니, 부분적으로. “이 지향성은 역사에 있어서 확실히 전능적이 아니며 ... 오로지 이념에만 맞추어진 역사과정의 목적론적인 상을 구성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다(단락 5).” 이념만이 아니라 원인도 찾아내어야 한다. 이를테면 ‘대한민국이 왜 이지경이 됐느냐?’에 대해서 따진다면, 대한민국인의 이념과 더불어 실증 과학적 탐구를 통하여 원인도 밝혀내야 한다. 이처럼 역사 탐구는 다층적이어야 한다.


인간의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 앞에 있는 것과 뒤에 있는 것. 앞에서 꼬시고 뒤에서 떠민다. 앞에서 꼬시는 것은 나를 유혹하여 내가 그것을 향해가도록 만든다. 뒤에서 떠미는 것은 ‘배고프면 밥 먹어야 한다’는 것처럼 내가 거부할 수 없는 것이다. 베르그송도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서 앞에서 우리를 끌어당기는 ‘희망aspiration’과 뒤에서 미는 ‘압박pression’을 제시한다. 이 물리적 압박을 무시하면 바보이다. 이를테면 ‘빵 만으로 살 수 없다’는 말에 ‘빵이라고 잘 챙겨 먹어라’라고 말하는 경우이다. 그렇다고 물리적인 것으로만 살면 그는 정체한다. 사물화 된다. 공동체가 압박에만 얽매여 살면 그 사회는 정체한다.

우리는 탐구할 때 ‘왜’를 묻는다. 이에 대한 대답은 두 가지이다. 1) 이미 있는 ‘원인’에 대한 대답이다. 이는 인과 관계에 대한 탐구 결과로 자연과학이 하는 일에 해당한다. 다른 대답은 2) 아직 실현되지 않은 ‘목적’에 대한 대답이다. 이를테면 ‘너 오늘 학교 왜 왔어?’라는 물음에 ‘공부하러 왔어’라는 대답이 여기에 해당한다. 따라서 “정신의 방향의식”은 목적의식이기도 하다.

목적을 밝히려는 탐구는 자연 과학에는 없다. ‘꽃이 왜 피나’라는 물음에 ‘가을에 열매 맺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면 이는 자연 과학적 탐구가 아니다. 그런데 종종 목적으로 생명을 설명하려는 유혹을 받기도 한다. 이 역시 온당치 않다. 인간의 삶은 목적과 원인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c에서 하르트만은 정신을 움직이는 두 가지 힘 중 이념을 논하였다. 공동체의 삶일 경우 그것은 역사의 의식, 목표, 방향을 결정한다. 이로부터 역사학이 과학이냐 이념이냐는 논란이 계속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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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정신의 삶에 있어서의 이중의 고유법칙성
  전체과정은 끊임없이 아래로부터와 위로부터, 정신외적인 세력으로부터와 정신적인 세력으로부터 동시에 규정되고 있다. 그것은 동시에 타율적이고 자율적이다. 어떠한 식자도 물질적, 생기적, 경제적 요인들의 힘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사람들은 이 요인들의 위쪽에 있는 이념의 요인을 쉽사리 망각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이 이념의 요인에 전념하는 나머지 보다 낮은 힘들을 보지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념은 한번 관취되면 눈을 매혹시키기에 말이다. 시대의 이데올로기들은 경영형태와 사회형태로부터 독립해 있지도 않고, 또한 그것들에만 의존해 있지도 않다. 여기에 마르크스주의의 정당함과 부당함이 있고, 또 여기에 관념론적 사회이론의 정당함과 부당함이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1. 형성된 공동정신은, 비록 그것이 개인적 정신들의 결합에 기초하고 있다 할지라도, 개인적 정신들의 총괄이 아니다.
2. 역사에 있어서의 공동정신의 움직임은, 비록 그것이 개인적 정신의 움직임을 요소로서 포함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개인적 정신의 움직임의 총체가 아니다.
3. 역사적 정신의 삶의 역동성은, 비록 사정(事情)들이나 개인적 욕구와 이니시어티브가 어느 때에나 유효한 요인들이라 할지라도, 홀로 사정들 만에 의해 몰아대어지는 것도 아니요, 홀로 개인적 욕구와 이니시어티브만에 의해 몰아대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언제나 개인과 함께 해서만 전체정신이 있고, 개인적 운명과 함께 해서만 역사적 운명이 있으며, 개인적 이니시어티브와 함께 해서만 역사적으로 움직이는 힘이 있다. 공동정신의 전체성은 개개인의 이니시어티브를 규정함과 똑 같이 그것 쪽에서 도로 개개인의  이니시어티브에 의해 규정된다. 여기엔 항상 정신의 두 이질적인 고유법칙성이, 즉 개인의 그것과 공통적인 것의 그것이 맞서 있다. 그리고  바로 양 고유법칙성의 상호간섭이야 말로 살아있는 정신의 완전한 자율성을 이룬다. 즉 양 계기는 상호간섭 자체 속에서 유효하게 작용하고, 상호 간섭으로부터 구별되지 않는다.
  이루어진 정신적 전체경향은 언제나 개인적 정신의 경향보다 힘에 있어 비교할 수 없으리 만큼 우월하다. 그러나 그것 자체는 개인적 경향의 역동성을 자신 속에 포함하고 있다. 전체성은 일단 생겨나면 개인들의 사이에 마치 알칼리액에 있어서의 결정처럼 작용한다. 개인적 경향이 엉겨 붙는 것이다. 이것이 개개인에게 가해지는 살아있는 역사적 정신의 힘이다. 개개인은 역사적 정신에 의해 붙잡혀지고 잡아당기어진다. 그는 역사적 정신에게 동화된다. 이것은 반대경향도 다시 개개인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과정의 역동성은 전체의 그것으로선 부분의 역동성과는 다른 것이다. 객관적 정신이 개인적 정신과는 다르다는 것은 현상의 모든 방향과 모든 양상에 있어 근본적인 것이다. 객관적 정신은 다른 서열과 실존 형식을 가진 형성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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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공동정신의 “전체과정은 끊임없이 아래로부터와 위로부터, 정신외적인 세력으로부터와 정신적인 세력으로부터 동시에 규정되고 있다(단락 1).” ‘아래로부터 규정, 결정하는 힘’을 강조한 경우에는 마르크스가 해당한다. ‘위로부터’의 경우에는 헤겔, 예수가 해당한다. 정신외적인 세력과 정신적인 세력, 다시 말해 물리적 압박도 정신적 희망도 모두 힘이다. 이것이 “정신의 삶에 있어서의 이중의 고유법칙성”이다. 이들 중 하나만 보려 하면 안 된다. 하르트만은 마르크스와 헤겔이 모두 부분적 진리를 이야기하였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하르트만은 황희정승처럼 히마리가 없다. 매력이 없다. 죄다 부분적으로는 옳다고 평가하니까.)

“몰아대어지는 것”(단락 5) - ‘추동’을 뜻한다.

“정신의 두 이질적인 고유법칙성”(단략 6) - 개인적 정신과 객관적 정신의 상호관계를 보면 알 수 있다.  개개인의 삶을 결정하는 계기와 공동체의 삶을 결정하는 계기는 상호작용한다. “그리고 바로 양 고유법칙성의 상호간섭이야말로 살아있는 정신의 완전한 자율성을 이룬다. 즉 양 계기는 상호간섭 자체 속에서 유효하게 작용하고, 상호 간섭으로부터 구별되지 않는다.(단락 6)”

“객관적 정신이 개인적 정신과는 다르다는 것은 현상의 모든 방향과 모든 양상에 있어 근본적인 것이(단락 7)”지만, 아래로부터와 위로부터의 규정을 갖는다는 점에서는 서로 같다.

“객관적 정신은 다른 서열과 실존 형식을 가진 형성체이다(단락 7)” - ‘객관적 정신은 개인적 정신과는 다른 차원과 실존 형식을 가진 형성체이다’로 이해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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