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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기철 ( http://dieBildung.net ) Date : 2008/09/17  Hit : 5217  Recommend : 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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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객체화된정신] 2주차 - 44절
08.09.12. (金)

강의: 손동현
발표: 이원석
필사: 신기철

*

3부 객체화된 정신

1장. 객체화의 현상과 형식

44절. 창작된 작품과 정신적 財

a. 고정함, 밖에 세움, 분리함으로서의 객체화

역사적 정신의 문제는 객체화된 것들의 현상군(Phänomengruppe)을 따로 분리시켜 고찰의 대상으로 삼자마자 한 차원 더 확대된다. 살아 있는 정신의 객체화된 것들은 살아 있는 정신과 대립하여 하나의 새로운 연속된 문제(Problemkette)를 드러나게 하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고 이미 서론에서 지적했었다. 왜냐하면 객체화된 것들에 있어 문제가 되는 것은 살아 있는 정신과는 다른 역사적 존재 방식의 형성물이기 때문이고, 한 번 살아 있는 정신으로부터 산출된 후에는 비교적 자립적으로 살아 있는 정신에 대립하고 그것의 변천, 운명, 소멸을 함께 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적 정신과 객관적 정신에 더불어 제 3의 근본 형태로서의 정신이 더 있다. 우리는 이 새로운 문제를 당분간 다음과 같이 특징지을 수 있다. 즉 살아 있는 역사적 정신은 그자체로 “객관적(objektiv)”일 뿐만 아니라 정신은 그것을 넘어서서 부단히 새로운 방식의 형성물들을 내어 놓고 이 형성체들에 있어 정신은 더 명료하게 포착할 수 있는 정신 자신과는 구별되는 “객체성(Objektivität)”을 자기에게 부여한다. 다시 말하자면 “자기를 객체화(sich objektiviert)” 한다. 이러한 형성물들은 정신 그 자체가 아니다. 또한 형성물들은 담지자로서 정신에 부착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정신은 형성물들을 자신으로부터 “밖에 세우고(herausgestellt)”, 마치 정신에 변천의 동요로부터 “자유롭게 놓아 준 것이다.(entlassen)” 그러나 정신이 형성물들을 자기 밖으로 세우고 놓아줌으로써, 정신은 결코 고정시켜질 수 없는 자기 자신과는 달리 형성물들을 “고정시킨다.(fixiert)” 정신은 그것을 자기로부터 떼어 내고 자립적으로 만듦으로써 그것을 자신에 맞세워 존립시킨다. 정신은 창작물을 독창적인 창작자로부터 분리시켜 그것을 역사에게 다시 말해 살아 있는 것으로서 창작자와는 분리될 다가오는 정신에게 넘겨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 자신은 창작된 형성물 안에 내용적으로 존속한다. 정신은 바로 자기 자신을 형성물 속에 고정시켜 놓았기에 정신 자신이 이미 더 이상 살아 있는 정신이 아니고 돌이킬 수 없는 역사에 속한다고 하여도 후세 사람들에게 형성물을 통해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형성물이 문제인가는 이로부터 이미 분명해진다. 우리는 이 경우 우선 저작과 예술의 창작물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정신의 창작물로 잘 알려진 이러한 영역이 우선 대표적인 것으로서 충분할 것이다. 사실 이 영역은 객체화의 중심적인 그리고 동시에 가장 완전한 형식을 포괄하고 있다.

우리가 이러한 점을 대면하면, 여기서 객체화란 명칭이 어떤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객체화를 “객관화(Objektion)”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객관화는 하나의 특징적인 인식현상이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사물이 주관의 객관으로 되는데, 이 때 사물 그 자체에 있어서는 변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이와는 반대로 객체화에 있어서는 그것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것 - 적어도 대상적인 특정한 형성체로서는 있지 않았던 어떤 것이 - 무엇보다도 우선 생겨나게 된다. 객관화에 있어서 살아 있는 정신은 오직 받아들일 뿐이고(nur aufnehmend), 객체화에 있어서 살아 있는 정신은 창작하고 있다(schaffend).

넓은 의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개개인은 그의 언어, 행동, 활동, 작업, 작품에 있어서 벌써 자기 자신을 객체화 하고 있다. 단지 그의 사유 속에만 있던 것이 그의 행위에서의 실현을 통해 사유로부터 나와 대상성(Gegenständlichkeit)에로 들어선다. 그리고 그가 고안해내고 산출해 내는 특정한 형태의 물건이(Dinge) 문제시되는 모든 곳에서 그는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동시에 그 스스로의 상(Bild)을 만들어 내고 그 상을 통해 그는 인식가능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 상은 그의 정신으로부터 나온 정신이며 그의 정신은 그 상을 통해 그를 볼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가능적 파악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

"정신적 財" - '정신적 산물'로 고칠 것.
"객관화(Objektion)" - '대상화(Objektion)'로 고칠 것.

대상화(Objektion)와 객체화(Objetivation)는 어떻게 다를까? 대상화는 하나의 사물이 나의 주관의 대상이 되는 것을 뜻한다. 객체화는 정신이 자신의 내용을 밖에 세워서 자신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을 뜻한다. 이를테면 교재 [[Das Problem des geistigen Seins]]의 내용은 하르트만의 정신이 '객체화'된 것이다. 이 책을 읽지 않고 그냥 보고만 있으면 그 책은 나에게 인식의 대상으로서 그저 '대상화'된 사물이다.

굳이 인식론의 realism실재론 / idealism관념론의 맥락에서 파악한다면, 실재론 입장에서 이 책은 내 인식의 대상이다. 그런데 이 책의 내용은 객체화된 것이다.

헤겔과 같은 극단적 관념론의 입장에 서면 세계의 모든 사물은 정신의 객체화로 파악할 수 있다.

하르트만은 실재론자다. 객체화된 정신의 내용은 물질적 사물로써 유지된다. 따라서 반 죽어 있는 정신이다.

정신은 자신의 내용을 고정시켜서 형성체 즉 객체화된 정신을 만들어낸다. 객체화되면 살아 있는 정신은 거기에 더 이상 관여하여 그 내용을 변경할 수 없다. 이에 객체화된 정신은 일단 형성되면 '고정되어 있다'.


*

b. 객체화의 분리되어 있음(Abgelöstheit)과 존속(Überdauern)

여기에서 물론 이 용어가 의미하는 것의 한계가 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매우 빈약하다. 정신의 객관으로 됨(Zum-Objekt-Werden)은 앞에서 인용했던 현상들을 넘어선 곳에서도 있다. 개인적 정신도 역시 아무리 그의 주관에 잘 묶여진 채로 있다 할지라도 이러한 의미(객관으로 된다는)에서 “객관적”이다. 살아 있는 공동정신(lebendigen Gemeingeist)에 있어서도 아무리 그것이 개개의 주관들의 삶에 잘 의존하고 있으며 그것들의 다수 이외의 어디에도 그 실존(Existenz)을 가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같은 것이 적용된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그 정신을 “객관적 정신”이라고 이른다.

이와는 반대로, 제 3의 근본형태로서 이해된 “객체화된 정신”은 살아 있는 객관적 정신에서와 마찬가지로 개인적 정신에서도 분리되어 있다. 객체화된 정신은 주관의 삶으로부터 밖으로 나와 있고, 그와 동시에 또한 그것을 산출한 바로 그 공동정신의 삶에서도 벗어나 있다. 그것은 “간신히(nur noch)” 객체화된 것으로서 존립할 뿐인, 그 자체 살아 있지 않고 발전하지 않는, 따라서 역사적으로 실재적인(reale) 정신이 아니고, 오히려 그의 형성체 그것에 있어서 고정된 것으로 된 그러한 정신이다.

살아 있는 정신의 성과인 정신적 財의 특성은 살아 있는 정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살아 있는 정신과의 대립에 있어서 특정한 각인(Prägung)과 내용을 가진 형성체로서 고정시켜진다는 것이다. 물론 그 본질에는 어느 시대에나 그것이 이러한 형성체로 형태를 갖게 되고 그 형성체에 있어서 고정화되는 경향을 보여 준다는 것이 놓여 있다. 그러한 형성체에서 객체화된 정신은 존속한다. 객체화된 정신은 형성체에서 하나의 고유한 존재 방식을 획득한다. 그 존재방식을 근거로 해서 객체화된 정신이 존속하는 반면 살아 있는 정신은 객체화된 정신 아래에서 변화한다.

객체화된 정신이 여전히 살아 있는 정신에 의존한다면, 그것이 개인적 정신에서든 객관적 정신에서든, 객체화된 정신은 그것과 함께 변화해야 하고, 그것의 운명과 죽음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에 객체화된 정신은 살아 있는 정신 보다 오래 산다(überleben). 또는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왜냐하면 본래의 생명을 그것에 귀속시킬 수 없기 때문에- 객체화된 정신은 살아 있는 정신보다 오래 존속한다(überdauern). 그리고 더 오래 존속함에 있어서, 자기를 객체화된 정신 속에 객체화 시켰던 살아 있던 정신 중의 어떤 것이 객체화된 정신 속에 보존된다. 그것은 단지 본래적인 의미에서 삶을 이어가는 것으로서도 아니고, 역사적으로 실질적인 것으로서도 아닌 그러한 것으로 보존될 뿐이다.

본래 무엇으로서 그것이 보존되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앞으로 다루게 될 물음이다. 이것은 하나의 존재론적 물음이다. 즉 객체화된 정신의 존재 방식에 대한 물음이다. 실질적 정신은 항상 살아 있는 정신일 뿐이다. 그러나 객체화를 통해서 살아 있는 정신으로부터 살아 있지 않은 형성체로 떼어 내어지고, 살아 있는 정신으로부터 밖으로 내세워진 정신이 어떻게 실존하는가?


*

2문단
"객체화된 정신은 “간신히(nur noch)” 객체화된 것으로서 존립할 뿐"이다. 객체화된 것은 하나의 정신이기는 하나 반 죽어있는 정신이다. 초죽음, 기절해 있는 상태이다.

하르트만 책을 오늘날 아무도 보지 않으면 그 책의 정신은 죽어있는 셈이다. 사람들이 읽어야 그 책의 정신이 살아난다. 이처럼 객체화된 정신은 '겨우' 존립한다.


3문단
"각인" - 이 책은 하르트만의 정신이 각인되어 하르트만의 살아있는 정신과 유리된 것이다.

더 중요한 말은 소제목에 있다. Abgeloestheit, 유리되어 있다는 뜻이다. 살아 움직이는 하르트만의 정신으로부터 이 책은 유리되어 있다. 그러니까 두 가지 점에서 우리가 양면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책은 반 죽었다. 물질 속에 갇혔다. 일단 책으로 내서 인쇄하면 끝이다. 반 죽어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온전한 정신이 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유리되어 있다. 떨어져 나갔다.

정신은 객체화 됨으로써 살아 있는 정신보다 오래 지속된다. 하르트만은 1950년에 죽었다. 그런데 58년 전에 죽은 사람의 정신이 이 책에 담겨 있다. 나아가 2000년 전에 죽은 사람 정신도 각각의 책에서 뿌시럭 거리고 있다. 정신이 살아있는 정신에서 떨어져 나가니까 오히려 오래 간다. 그런 까닭에 나아가 역사도 성립할 수 있다.


4문단
객체화된 정신은 "단지 본래적인 의미에서 삶을 이어가는 것으로서도 아니고, 역사적으로 실질적인 것으로서도 아닌 그러한 것으로 보존될 뿐이다."

서양 존재론의 핵심 물음은 '진짜 있는real 것이 무엇이냐'이다. 가짜 있는 것은 real하지 않은 것이다.

real실재 - irreal虛허재

실재Ansichsein - 누가보든 안보든 있는 것.
허재Fuerunssein - 우리에게 있는 것. 그 중에서 Being in itself도 있지만, for us being우리에게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도 있다. 허재는 존재론의 대상이 아니다. 존재론은 실재를 탐구한다.

그 자체로 있는 것에 두 가지가 있다. Aristoteles이래 서양 존재론의 기본 생각이기도 하다. 그 두가지는 ideal과 real이다. (인식론적 대비에서의 idealism관념론 / realism실재론 은 잠시 접어두자)

1) 감각적 지각의 대상인가, 아닌가 - 감각적 지각의 대상이면 확실히 있는 것, 즉 실질적인 것으로 보는 입장이 있다.
2) 사유대상 - 진짜 있는 것은 사유의 대상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플라톤이 그렇게 말했다.

칸트는? 감각적 지각의 대상이 된 것만 사유의 대상이 된다고 살짝 빠져나갔다. 절충 잘 했다.

공간을 차지하지 않고 시간의 흐름 속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 책은 감각적 지각의 대상이다. 공간적 제약 속에 있다. 그런데 공간적 제약에서 벗어나고서도 시간의 흐름 속에 있어서 감각적 지각이라하기에는 좀 어렵고 '내감적 지각(칸트의 용어)' 속에 있는 것이 있다. 이를테면 '나 지금 기분 나쁘다'는 것을 나는 안다. 만져보고? 거울보고? 아니다. 내 감정은 내가 직감한다. 그것을 칸트는 내감이라고 표현했다. 이러한 심성적 작용들은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다. 보통 감각적 지각의 대상은 시공안에 들어와 시공의 제약을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공간에 들어오지 않고 시간에만 제약받는 것까지도 real하다고 할 수 있다.

시, 공 다 벗어나는 것은 생각의 내용이다. 1+1=2라고 생각하는 의식의 활동은 공간 제약에서 벗어나되 시간 속에 들어온다. 그러나 1+1=2라는 생각의 내용은 시간도 벗어난다. '1+1=2'는 있는 것인가, 다만 내가 생각하는 것인가?

영미 심리철학에서 Being은 'Having causal power'이다. 내가 의자를 차면 의자는 넘어간다. 그렇지 않으면, 즉 causal power갖지 않으면 그 의자는 없는 것이다.
딜타이는 이를 Widerstandserlebnis저항체험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저항체험을 통하여 세계의 실재를 확인한다. 언어분석 철학 용어로 말하면 causal power를 갖는 것이다.

'1+1=2'를 지키지 않으면, 건물이 무너진다. 1+1=2는 있다. 시간, 공간 안에는 아니다. 이것이 이법적ideal인 것이다.

reality, Ansichsein실재에 있어 real실질적인 것과 ideal이법적인 것의 궁극적 차이는 시간적 흐름을 타느냐 안 타느냐에 있다. 둘다 Ansichsein이기 때문에 '저항한다', 'causal power를 갖는다'.

그런데 '인과관계'는 사실 안 맞는 말이다. 논리적 관계이지 사실적 관계는 아니기 때문이다. 저항하는 것 중에는 논리적인 것도 있고 인과적인 것도 있다고 보면 이것이 정합적 구분이겠다. 논리적인 것 중 가장 추상화된 것이 수학일 것이다.

단 한 사람에게만 저항한다면? 그것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누구에게는 저항을 안 하고, 누구에게는 저항한다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고 누구는 감동하고 누구는 몇 페이지 읽다 던진다. 그러면 마르트 미첼 여사의 생각 내용은 존재하는 것인가, 존재 안하는 것인가. 존재하는 것인데, 요러요러한 방식으로 상대적으로 제약 받으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객체화된 하르트만의 정신은 Fuerunssein이다. 누군가가 봐야 살아난다. 그래서 부차적 존재이다. 그것도 역시 존재는 존재다.

동일한 객체화된 정신을 놓고 사람에 따라 해석을 달리 하는 경우는? 우리에 대한 존재이기 때문에 해석은 달라진다. 그래서 객체화된 정신은 온전치 못한 존재이다.


*

c. 해방된 존재로서의 비실질성(Irrealität als Enthobensein). 창작하는 정신과 창작된 정신

모든 살아 있는 정신은 개인적 정신이나 공동정신이나 다 같이 자기를 객체화 시킨다. 더욱이 그의 모든 영역에서 객체화시킨다. 한 시대의 법의식은 “현존의 법률(gegebenen Gesetz)” 속에, 하나의 확정되고 성문화된 실증법(positiven Recht) 속에 자기를 객체화시킨다. 앎은 하나의 학문체계 속에 자기를 객체화시키고, 말과 문자 속에 고정시켜져 있다. 이러한 방식의 객체화는 당분간은 살아 있는 정신에 들어붙어 있고, 그것에서 분리되지 않고 있으며, 다만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생한 법의식이나, 또는 현실적 인식의 머무름이다. 이러한 공통적인 것으로서의 법의식과 그러한 인식 속에 살아 있는 객관적 정신이 존재한다. 그러한 것으로서의 객체화는 객관적 정신으로부터 그의 생명을 빼앗지 않는다.

그러나 객관적 정신은 정지해 머물지 않고 계속 움직인다. 법의식과 함께 현행법이 변하고, 인식의 진행이 실증적 앎으로 변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이전의 법과 이전의 학문 가운데 무엇이 남아 있을까? 그것들 중에 언어의 영속적인 형식에 각인되고, 기록된 것이 남는다. 그러할 때 문자적으로 고정되어지는 것에서 후대 사람들에게 - 당시의 법 또는 지식으로서- 인식 가능하게 된다.

창조된 것이 창조자 보다 오래 존속한다. 그것이 정신적 존재의 역사에 있어서의 법칙이다. 살아 있는 정신은, 개인적 정신이건, 공동 정신이건, 모든 살아 있는 것의 법칙에 복종한다. 살아 있는 정신은 쇠퇴하여 죽게 마련이다. 또한 중단 없는 변화에 있어서도, 민족들과 문화들이 가시적인 멸망 없이도 특정한 역사적 정신은 다른 정신에게 길을 양보한다. 창조된 것은 다른 법칙에 복종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기에 살아 있는 것과 함께 죽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질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질적인 것의 냉혹함을 그 자체로 갖지 않으며, 그것의 창작자에게 일어났던 파멸을 경험하지 않는다.

이는 다음과 같은 하나의 특이한 전체상을 낳는다. 살아 있는 정신이 끊임없이 소멸하고 쇠퇴하는 가운데 창조된 정신적 財가 보존된다. 그것은 말하자면 정지하고 있다. 창작된 정신은 그 비실질성에 의하여 창작하는 정신의 운명에서 벗어나 있다. 그것은 역사의 요란한 행진에 의하여 저촉되지 않는 영역으로 높여진다. 창작하는 정신이 사멸하는 경우에도 그것이 남아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리고 창작된 것이 창작자에 대한 증언을 해주고, 산 정신을 항상 나타내고 있는 까닭으로 - 그 특수한 내용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 창작된 것은 그것이 획득한 객체형식에 있어서, 비록 과거의 정신적 삶일망정, 사실상 정신적 삶의 객체화로서 존속하는 것들이다.

또 지적되어야할 점은 그 속으로 정신적 財가 끌어 올려져있는 영역이 결코 곧바로 초시간성의 영역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점은 객체화도 파멸의 수중에 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 명백하다. 저작은 되돌릴 수 없이 상실될 수 있고, 예술작품은 파괴될 수 있다. 그것은 시간성과 실질성에 의한 제약성을 결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제약성은, 그 자체가 그리고 온전하게 하나의 역사적 실질자이고 그의 생존기간을 넘어설 수 없는 그런 살아 있는 정신의 제약성과는 다른 것이다. 객체화된 것은 일정한 생존기간을 가진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현상만이 당분가 문제가 된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그 현상의 제한을 처음부터 안중에 두더라도, 그 현상은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객체화된 정신의 법칙은 따라서 다음과 같다. 객체화된 정신은 일단 창작된 산물로서 형성되어 나오면, 창작하는 정신으로부터 독립성(Unabhängigkeit)을 획득한다는 것이다. 이 독립성에 있어서 그것은 하나의 고유한 방식의 생존을 역사 안에서 영위하게 되고, 객체화 정신의 진행되는 삶과 나란히 그 밖에서 하나의 고유한 존재방식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물론 여전히 살아 있는 정신 일반에게 매여 있기는 하지만, 일정한 정신에게, 즉 그것을 산출한 정신에게 매여 있는 것은 아니다. 하여튼 객체화된 정신은 살아 있는 정신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다. 그것은 살아 있는 정신의 진화를 함께 하지 않으며, 살아 있는 정신의 운명에 복종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저 살아 있는 정신의 운명의 한복판에서 따로 그 자신의 특별한 운명 - 말하자면, 어떠한 살아 있는 정신도 그것과 공유할 수 없는 그러한 운명을 갖고 있다.


*

"성문화된 실증법(positiven Recht)" - '성문화된 실정법(positiven Recht)'으로 고칠 것.
"독립성(Unabhängigkeit)" - '독자성(Unabhängigkeit)'으로 고칠 것.

객체화된 정신은 독자성을 갖는다. 그렇다고 초시간적으로 이법적으로 되지는 않는다. 수명이 길어진다. 그래서 역사성을 갖는다. 거기에도 역시 죽고 사는 것은 있다.

어떤 작가는 젊었을 때 쓴 작품 다 없애버리고 싶다고 한다. 나이가 들면서 작가의 정신도 진화했으니까. 그러나 그가 쓴 작품은 이미 작가의 정신과는 따로 떨어져 독자적인 것이 되었다. "창조된 것은 다른 법칙에 복종한다.(3문단)" 물리적인 법칙, 자연 법칙에 복종한다. 책을 불어 넣으면 타버리니까. 그 책에 깃든 정신은 사라진다. 분서갱유를 왜 했나. 불에 태워도 살아 남을 수 있나.

정신은 객체화되면 일단 물질의 법칙에 따른다. "실질적인 것의 냉혹함(3문단)"을 겪지 않는대신(즉 창작자처럼 죽지 않는 대신), 다른 냉혹함을 겪는다. 즉 물질 법칙에 지배된다.

실정법과 자연법의 차이, 존재론적 관점에서 볼 때 그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실정법'을 'positive Recht실증법'이라고도 하는데, '실정법'이 더 맞다. 'posit'은 '앞에다 놓는다'는 뜻이다. 실정법에 따르면 '시대가 바뀌면 법도 바뀐다'. 자연법은 인간 본성이 바뀌지 않는 이상 바뀌지 않는다. 실정법이 당대의 법 감정을 구현하는 것이라고 말할 때, 즉 공동정신의 객체화라고 말할 때, 자연법은 무엇인가?

자연법은 각각의 시대와 공동체에 속하는 공동정신들에게 공통되는 공동사회의 기본 틀이 객체화된 것이다. 그런데 자연법이 문서로 적혀 있지 않은 까닭에 객체화되었다고 말하기 힘들다. 자연법이 시대적, 문화적 상황에 맞게 객체화된 것이 실정법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객체화된 정신은 창작된 정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실질성을 갖지 않기 때문에 해방된 존재로서의 비실질성에 해당한다. 그런데 실질적 존재도 이법적 존재와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 있어야Ansichsein한다. 온전히 그 자체로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읽지 않으면 그것은 죽어 있다.

로제타 돌, 나폴레옹이 사하라에서 끌고 파리로 가져온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해독해 내니까, 고대 이집트의 정신이 사하라 사막 속에 묻혀 있다가 파리에 와서 살아난 것이라고 비유한다. 그러니까 '자체로 있다'라고 말하기 어렵다. '없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김춘수의 [[꽃]]과 똑같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것은 나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 불러주어야 꽃이 된다. irreal flower가 real flower되려면 누군가가 불러 주어야 한다.

'Enthobensein', 벗어났다는 뜻이다. 생동하는 정신의 흐름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생동에서 벗어났으니 죽은 거다. 누군가가 봐줘야 살아난다.


*

d. 비자립적 객체화와 자립화한 객체화

만약 우리가 모든 살아 있는 정신은 그의 모든 형성 작용을 통하여 생활 자체 내에서 이미 자기를 객체화하고, 그러나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객체화된 것들을 대개는 마찬가지로 쉽게 다시 포기하고 만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면, 우리가 자립화한 형성체라는 의미에 있어서의 “객체화된 정신”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범위를 정해주는 그러한 경계선을 긋기가 어렵게 된다.

그래서 예를 들면, 모든 담화는 그 덧없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넓은 의미에서의 객체화이다. 왜냐하면 담화는 그 내면성 밖으로 객체성 속에 내세워진 그러한 사상이 어떤 형태를 갖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말하여지는 살아 있는 언어 전체를 또한 객체화라고, 게다가 아주 특정한 객체화라고 부를 수도 있다. 아니, 언어는 그러한 객체화로서 느껴지기조차 한다. 어휘는 공통의 소유물이다. 그리고 언어는, 그 언에로 “학습하면서(lernend)” 접근해 가는, 다른 언어를 말하는 정신에게는 분명히 이러한 객관적으로 형성된 어떤 것으로서 마주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객관적으로 형성된 어떤 것은 살아 있는 언어 속에 존재하면서 말하여짐에서, 즉 살아 있는 공동 정신에서 아직 분리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살아 있는 언어를 완전히 습득하고자 하는 사람은 생활하고, 말하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로 끼어들지 않으면 안 되고, 그 스스로 말하는 자로서 그 언어의 살아 있는 정신 속에 “성장해 들어가 적응해야(hineniwachsen)” 한다. - 이 점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살아 있는 객관적 정신 속으로 성장해 들어가 적응함과 다를 바 없다.

이 종류의 객체화는 아직 자립화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아직 유동적이고, 순간과 개별성의 모든 동요와 동행하는 것이고, 살아 있는 정신에 의하여 전적으로 부담되어 있고 그것에 대하여 비자립적인 완성 형태(Ausformung)이다. 따라서 그것은 객체화이고, 또 종종 그러한 것으로서 감지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것은 다만 살아 있는 정신의 한 생명요소와 같이, 말하자면 개인들 간의 교환에서의 살아 있는 정신의 화폐로서 구실을 할 뿐이다. 왜냐하면 말하여지는 말은 “덧없고(flüchtig)”, 그것이 일단 들려지고 이해되고 나면, 그것 자체는 또한 잊혀 지기도 한다. 말하여지는 말은 그것이 매개해 주는 것의 배후로, 즉 아직 살아 있고 유동적인 사상의 배후로 사리지고 만다.

이러한 사태에 직면하여 다음과 같은 물음이 제기된다. 어디에 객체화가 자립적 존재방식으로 오르고, 객체화를 부담하고 계속 형성하는 역사적 정신의 변천에 의존하지 않게 되는 그러한 경계선을 그어야 할 것인가? 객체화를 고정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살아 있는 정신만이 그것을 부담하는 한, 객체화는 그것에 대한 자립성을 획득할 수 없다. 그런데 담지자 없이는 객체화는 존속할 수 없다. 따라서 객체화를 위하여 살아 있는 정신의 자리에 무엇이 담지자로 대신 등장해야하겠는가? 왜냐하면 아무것에 의해서도 부담되지 않는 부유하는 정신(schwebender Geist)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물음은 이것이 개인적 정신의 삶에까지 속속들이 미친다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알 때, 더욱 절실한 것으로 된다. 개인의 모든 표시, 모든 말, 모든 몸짓, 모든 행동이 벌써 객체화이다. 한 인간은 그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에 있어서 바로 대상적으로 파악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파악될 수 있는 것은 그 자체 언제든지 자립화할 수 있는 것이고, 견고하게 각인될 수 있고 고정시켜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격언의 역사적 의의, 구전되거나 기록된 일화의 의의를 생각해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알렉산더 대왕의 풍모는 한 계열의 그 자체 하찮은 언사와 특징적인 사소한 장면들에 있어 고정시켜져 있다. 한 특정한 인간의 개인적 정신은 그러한 것에 있어서 직관할 수 있는 객체거니와, 그것도 그의 생애를 훨씬 넘어서까지도 그렇다. 꾸며낸 일화조차도 그의 상을 당대 사람들이나 얼마 뒤의 사람들이 보았던 것처럼 생동감 넘치게 보여 준다. 그가 뒤에 남긴 객관적 “인상(Eindruck)”이 그 속에 고정시켜지고 후세에 전하여진다.

오늘날의 생활에서는 일화 외에도 사진이나 영화 촬영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의심할 바 없이 우리시대의 중요한 인물들이 이런 방법으로 아주 개성적이고 인간적으로 내면적인 특징에 있어서 후세를 위하여 보존될 수 있을 것이다. - 아마도 겨우 이러한 객체화된 것들에서나마 그들을 알게 될 후세를 위해서 말이다.


*

살아 있는 정신의 흐름에서 벗어나서 고정되는 것이 객체화된 정신이다. 모든 것은 객체화되는데, 비자립적 객체화와 자립적 객체화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완전하게 자립화되지 않은 것으로 언어가 있다. 이를테면 음성 언어는 고정된 것이 미미하고 약해서 자립화되지 않는다. 이에 구전은 생동하는 정신에 여전히 의존한다. 이와 달리 생동하는 정신에서 벗어나 다른 것에 의존하는 것은 물질에 의존한다.

광개토대왕 비 - 물질에 의존함으로써 고정되어서 자립화 되어 있다.
왕, 신하 등을 통해 구전되는 것 - 고정이 덜 되어 자립화되어 있지 않다.

말하는 것의 생명은 말을 멈추면 끝난다. 살아있는 정신과 수명을 함께 한다. 자립화되어 있지 않다.


4문단
"객체화를 고정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 객체화를 위하여 살아 있는 정신의 자리에 무엇이 담지자로 대신 등장해야 하겠는가?" 객체화된 정신은 물질적 산물, 물질층에 실려야 한다. 그래서 신기한 것이다. 존재 층 Materie / Leben / Seele / Geist가 있을 때, 객체화된 정신의 존재층은 M/G이다. L과 S가 없다. 그냥 물질에 얹혀 있다. 그래서 아주 불완전하다. 존재론적 수수께끼다. 어떻게 물질에 정신이 맞바로 얹히느냐. G는S에, S는 L에 L은 M에 얹히는 것인데.

그래서 나는 이렇게 해석해봤다. 여기에 담겨져 있는 자립적인 그러나 반 죽은 하르트만의 정신을 내가 읽어서 다시 살린다는 얘기는, 결여되어 있는 중간 존재 층을 메꿔주는 것이다. 뭘로 메꿔? '나'로. 내가 그 속으로 파고 들어가 L과 S를 연결시켜 주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기록이 등장하면서. 문자 언어가 등장하면서. 사람들은 이성적 사유, 정확하게 말하면 논리적 사유를 하게 되었다. 음성 언어만 있는 문화권 구성원들은 논리적 사유를 하지않는다. 논리적 사유가 거추장스럽다. 그들은 복합적, 직관적 사유를 한다. 논리적 사유를 하는 사람과, 논리적 사유를 못하는 사람이 싸우면 누가 이기는가? 다시 말해서 양자가 어떤 일을 기획할 때, 어떤 사람의 기획이 더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을까?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조폭 두목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조폭 두목 하려면 치밀한 논리적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논리적 사유를 하면 우리의 잡다한 경험을 단순화시키는 구조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잡다한 것이 잡다한대로 있으면 추스르지 못하여 내 삶에 기여하지 못한다. 논리적 사유는 잡다한 것을 추스르는 것이다. 논리적 사유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훈련 받으려면 문자 언어를 통해서 가능하다. 음성언어로는 발달하지 못한다. 음성언어는 추상언어가 아니다. 구상언어이다. 말할 때의 장면, 제스쳐, 문맥, 배경이 다 거기에 얽혀 있다. 외국인과 얘기할 때 더 불편한 이유? 구체성이 빠지고 추상성만 남기 때문이다.

문자가 되면? 진짜 추상적인 것만 나온다. 맥루한의 이론이기도 하다. 우리가 사물을 지각할 때, 시각적 지각은 총체적으로 지각하는 것이다. 총체적으로 주어진다. 그래서 논리적 사유가 별로 필요 없다. 음성 언어로 지각할 때는 시각적 언어가 많이 가미된다. 오히려 시각적 내용이 더 결정적일 수 있다.

'너 죽어'라는 말은 시각적 지각 내용에 따라 '죽인다'와 '사랑한다'의 정 반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시각적 지각 내용은 simultaneously하게 일어난다. mosaic로 나타난다. 모자이크를 알려면 한꺼번에 봐야 한다. 동시적이다. 음성 언어가운데 시각적 내용을 싹 빼고 추상화시킨 것이 문자언어이다. 그러면 linear선형적이다. 순서 따라가면서 봐야 한다. 앞에 것 알아야 뒤의 것도 알 수 있다. 순차적이다. 맥루한 [[미디어의 이해]]에 나오는 말이다. 순차적인 만큼 논리적 사유를 통해야 이해할 수 있다.

정신이 밖으로 나가서 자립화할 때, 여러가지 방식으로 자립화한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책이다. 책이 가장 중요하다. 복잡 다단한 것을 단순화시킨 것이니까. 만일 형상화된 것으로 남긴다고 해보자. 조각 공원 수만 평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책은 다양한 내용을 추리고 추려서 가장 단순한 형태로 압축한 것이다. 그러한 정신이 객체화되어 자립화되면 무서운 것이다.

문자언어가 등장한 문화공동체만이 살아 남는다. 지금도 문자 없는 문화공동체가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전혀 주도적 역할 못 한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정신이 객체화되어 자립성을 갖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다.


*

e. 덧없음과 고정화. 자립적 존재형식

바로 이러한 극단적인 예에서 우리는 객체화된 정신의 영역이 얼마나 엄청나게 넓은가를 잘 보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객체화된 정신의 자립성의 한계를 어디에 그어야 할 것인지도 본다. 정신적 삶 자체가 바로 언제나, 바라건 바라지 않건, 객체화된 것들로 충만해 있다. 사람들의 교제(Verkehr), 의견 교환(Meinungsaustausch), 사람들이 서로를 위하여 함께 살아가는 공동생활은 객체화된 것들을 부단히 필요로 한다. 아니 객체화가 없다면 주관적인 개별 정신이 자기 자신 속에 폐쇄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모든 전달은 벌써 객체화의 형태를 갖고 있는데, 다만 그러한 것으로서 고정시켜져 있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형태를 갖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고정시켜질 “수 있는(kann)” 것이다. 그것은 원리적으로는 살아 있는 정신에 전달의 사적 목적(privaten Zweck)에서 전달이 그 속에 관여해 들어가는 특수한 생활상황에서 분리될 수 있다.

그런데 무슨 까닭으로, 어떤 객체화된 것들은 그것들이 자립적 존재로 승진함으로써 고정시켜지고, 분리된 것으로 존속하는 한편 - 다른 객체화된 것들은 정신의 삶의 흐름 속에 곧 다시 가라앉고 마는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으로서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는데 이것은 아주 서로 다른 종류의 것으로서 서로 독립적으로 변화하면서도, 서로 엄밀히 관련되어 나타난다. 그 하나는 내면적인 이유로서 정신적 내용의 느껴진 유의의성의 큰 차이에 있고, 따라서 그것은 객체화되는 것의 정신적 무게에게 있다. 다른 이유는, “그 속에(in dem)" 내용이 객체화 되는 재료(Material)의 차이에 있다. 왜냐하면 재료는 일시적이거나 또는 안정된 것일 수 있고, 그 속에 새겨진 형식을 무상성(Vergänglichkeit)에 내어 맡기거나 또는 시간과 변화를 초월하여 그 형식을 꼭 붙들어 둘 수 있거나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정된 재료 속에 객체화된 것만이 분리된 자립적 존재방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은 말할 나위 없이 분명하다. 이에 못지않게 또한 살아 있는 정신에게 중요하게 보이는 정신적 내용만이 안정된 재료 속에 객체화된다는 것도 분명하다.

말하여지는 말은 대개 덧없는 것이다. 생활에 있어서는 중요성이 말 그 자체에 두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두어지는 바, 말은 이 상황 속에 포함되고, 상황의 형성에 참여하는 요소이다. 말은 그 상황 속에서 그의 작용을 다 마치고 나면 듣는 사람에 대하여 그 역할을 다한 것이다. 몸짓, 표정, 태도에 관해서는 훨씬 더 타당하다. 이것은 모두 생활의 생동적인 흐름 속으로 되돌아가고, 마치 말이나 몸짓 따위가 오직 생활의 흐름만을 목표로 하고 있었던 것과 같다. 말하여진 말이나 사람의 태도에 있어서 특별히 중요한 의의가 느껴지는 경우에야 비로소 사정이 달라진다. 그 자체 덧없는 개인적 행동이 지닌 정신적 내용의 무게가 각인된 객체화된 것에게로 양도된다. 즉 말은 내용적인 의의를 가지게 되고, 품위 있는 것으로 청취되어지며, 고정시켜진다. 그러나 고정시키는 데는 하나의 다른 수단이 필요하다. 즉 말은 기록되고 문헌 속으로 옮겨간다. 이는 곧, 말이 하나의 다른 영구적인 질료(dauerhaftere Materie)로 바뀌어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사태를 설명해주는 가장 큰 예는 소크라테스의 사상재(Gedankengut)가 소크라테스 학도들의 세력 범위에서 계속 삶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소크라테스의 담화”(대화)는 거듭해서 이야기 되곤 했었다. 그의 담화는 그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잊혀 지지 않을 만큼 아주 중요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구전 되는 가운데 변질될 위험에 처해 있었고, 개개인의 적응, 자신의 의견과 그 의견의 계속적 전개가 소크라테스의 담화 속에 들어가 작용을 했었다. 기록됨으로써 그것은 비로소 본래적으로 객체화 되고 변질을 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기록은 직접 “소크라테스의 담화” 자체를 고정시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크라테스의 것이 아닌 사상에 의해 가공된 것을 고정시켰기 때문에 소크라테스의 인간상과 사상가적 상(denkerishe Bild)은 오직 이러한 가공된 것의 거울 속에서만 우리에게 보존되고 있을 뿐이다.


*

앞 내용의 연장이다. 흘러지나가는 것과 좀더 고정되어 지속되는 것의 차이. 어떤 요건이 필요한지에 관한 논의이다.

고전연구자들은 어떤 것이 원본인지만 따지기도 한다. 문헌학 하는 사람들이다. 광개토대왕비처럼 세워 놨으면 확실할텐데, 구전되다가 쓰는 놈이 자기말 섞기도 하고 빼기도 했다.

정신이 S, L 뛰어 넘고 물질에 담기면 요지부동이 된다. 늙지 않는다. 뒤에 나오는데, 객체화된 정신은 이중적 존재 방식을 갖는다.

랩과 클래식의 차이 등을 존재론적 층을 가지고 분석하면 재밌다.

옛날 사람들은 왜 돌에 새기려고 했을까? 오래 가니까. 정신이 담기는 Materie에 따라서 오래 가기도 하고 오래 가지 못하기도 한다. 돌 중에서도 푸슬푸슬한 돌은 싫었을 것이다. 딱딱한 돌, 동아시아에서는 화강암이 대표적이다.

레닌, 마르크스 동상 철거는 객체화시켜 놓아도 나중에 살아있는 정신에 따라 없어질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

f. 자립화의 한계

살아 있는 정신에서 걸어 나옴과 자립적 존재방식으로 승진함의 한계는 이에 따라 문헌에 있어서의 고정화에 의하여 뚜렷이 부각된다. 이에 대해서는, 실제로 말하여지는 말의 단순한 기록이 문제가 되느냐, 아니면 장면 전체를 일화로서 고정시키는 것이 문제가 되느냐, 또는 들은 것과 체험한 것을 후일에 가공해서 새것을 만드는 것이 문제가 되느냐 하는 것은 아무래도 좋다. 그리고 문헌대신에 다른 안정된 물질이 사용되는 다른 영역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하여튼 이 고정화는 의미의 중요성에 대한 어떤 의식 없이는 결코 생기지 않는다.

이 사실은 정신의 삶 자체 속에 등장하는 문헌 내부에도 자립적 존재로 승진하지 못하고 문자로 쓰여 진 것이 일시적 상황에 있어서의 그 특정목적을 달성하자마자, 말하여지는 말과 같이 살아가는 가운데 다시 사라지고 마는 방대한 양의 문자로 쓰여진 것이 있다는 것을 고려할 때 분명해진다. 예컨대 각종 서신이 그렇다. 일단 읽혀지면 서신은 의사전달로서의 그 의미를 발견한 셈이고, 그것으로써 사람들에 대한 그 용무는 끝난 셈이다. 순간과 사사로운 일의 영역을 넘어서까지 미치는 의미의 중요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사막의 모래 속에 파묻힌 파피루스 조각과 같은 그러한 문서 조각도 “우연(Zufall)”에 의하여 보존 될 수 있고, 그것이 여러 세기가 지난 뒤에 후세인이 그 시대상을 재구성(Rekonstruktion)하는데 의미 있는 것으로 될 수도 있다. 고정화 시키는 것 그것은 객체화의 재료가 되는 문서의 본질 속에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대개 중요한 것이라야 그 중요성에 의하여 이 문서 더미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같은 시대의 무수한 편지들은 분실되었는데도 플라톤의 소수 편지만은 거듭해서 베껴 쓰여서 보존되었다. 누가 이 점을 유감스럽게 여기겠는가? 그러나 편지의 운명을 결정한 그 중요성의 감지라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분히 주관적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문자(Schrift)”가 객체화된 것들을 담지하고, 고정시켜서 시간적 변천을 넘어선 데로 끌어 올리는 독특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어떤 중요한 점을 의식적으로 확립하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문자를 많이 사용한다. 증서, 법전, 학문적 공식 등은 이에 대한 개별적 사례에 불과하다. 여기서는 어디서나 다음과 같은 사정이 특별하다. 즉 여기서는 어떤 우연적인 의견이 의도적이 아닌 중요성에 의해 고정화에 승진하는 것이 아니라, 사태의 감지된 중요성이 처음부터 고정 가능한 형식으로 주조하게끔 몰아댄다는 것이다. 극단의 경우로서 여기에 다음과 같은 사태를 인증할 수 있겠다. 즉 어떤 발견자가 그의 새로운 통찰로 해서, 그 내용이 당분간 널리 알려지지 않은 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위를 확보하려고 할 때, 생기는 그 사태 말이다. 즉, 그는 자기의 통찰의 공식화를 비밀로 해두고, 그 열쇠는 자기가 간직해 두었다가 충분한 확증이선 후에야 그 열쇠를 넘겨주곤 하는 수가 있는 것이다. 문자는 닫혀 있는 것과 판독불가능(Nicht- Entzifferbare)한 것도 그러한 것으로 꼭 붙들어 둔다.

이에 따라 다음과 같이 총괄해서 말할 수 있다. 모든 영역에 걸쳐서 살아 있는 정신 자체 속에 벌써 객체화가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자립적 존재형식에 있어서의 객체화된 정신은 다만 영구적인 재료 속에 고정시켜진 객체화일 뿐이다. 이 제한을 적용한다면 객체화된 정신의 전형적 형성체의 계열이 드러나는데 우리는 근본현상으로서의 이들 형성체에서 옳은 방향을 찾지 않으면 안된다. 정신의 모든 종류의 영구적인 창조물이 이에 속한다. 그러나 “지속(Dauer)" 자체는 무제한의 존속으로서 또한 양적으로 측정 가능한 지속으로서 이해하면 안 된다. 오직 그리고 전혀 특별히 이 창조물을 만들어 낸 살아 있는 정신보다 더 오래 존속하는 것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

자립화의 여러 양식 중 어떤 것이 제일 중요한지, 한계가 무엇인지 이야기한다. 이중적이다.


3문단
"사태의 감지된 중요성" - 어떤 문중은 족보를 요란하게 만든다. 그런데 후손들 중 족보를 보자는 사람이 없다. 어떤 문중에게는 미국 대학이 돈을 줘가며 족보를 만들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자립적이고 지속적이려면 1) 튼튼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2) 객체화된 내용이 후대인에게 거듭거듭 요구되는 내용이어야 한다.

플라톤 대화내용은 누가 요구한 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계속해서 베낀다. 그 정신은 죽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객체화된 정신의 자립성과 지속성을 담보하는 것은 물질적 토대 만이 아니다. 내용이다. 그 내용이 다른 생동하는 정신에 의하여 중요한 것으로 인지되어야 한다.

객체화된 정신이 초기 상황에서 왜 필요했을까? 우리는 모두 객체화하는데? 그런데 자립적이고 지속적인 것을 만들고자 한 것이다. 중요한 것이니까. 그것이 역사의 토대가 되고 공동정신의 토대가 된다. 아주 초기 상황에서 그것은 어떤 필요에 의해서 생겨났을까? 의사소통 하려고. 문자가 있어야 의사소통되지 않는가. 말로 하면 된다고? 그 사람 내일 간다면? 혹은 나는 서울에 있고 그는 부산에 있는데? 남 시켜서 전달한다고? 잘못 전달하면 어쩔 것인가.

문화공동체의 형성, 역사성의 형성은 역시 personaler Geist의 활동에서 시작된 것이다.


4문단

"자립적 존재형식에 있어서의 객체화된 정신은 다만 영구적인 재료 속에 고정시켜진 객체화일 뿐이다"

자립적인 것 - 쉽게 말해 물질에 담긴 것이다. 튼튼한 물질. 이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윗 단락의 "감지된 중요성"이다.

"닫혀 있는 것과 판독 불가능한 것(3문단)"의 여부는 객체화시키는 정신에게 달려 있지 않다. 닫혀있느냐 열리느냐는 나중에 보는 정신에게 달렸다. 시대적, 공간적으로 떨어진 다른 영역의 문제이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그 내용이 중요해서 후대의 살아있는 정신에게 중요한 것이면 그것은 객체화되면서도 지속성을 갖는다.

객체화된 정신이 다시 살아나는 과정은 나중에 또 나올 것이다. 예술 감상의 정신적 활동은 객체화된 정신을 다시 살리는 것이다. 반쯤 죽은 정신을 다시 되살리는 것이다. 물론 문자해독, 교육, 피교육 모두 그렇다.

정신의 객체화가 드러나는 문화의 영역을 크게 나누면 광범한 의미의 의사소통과 넓은 의미에서의 도구이다. 집도 도구, 기계도 도구이다. 이 컵에 제작자의 정신이 들어가 있다. 컵을 필요로 하는 당대의 공동정신이 들어가 있다. 요즘 표주박 들고 다니는 사람이 없지 않은가. 하나의 문화 산물로서 정신이 객체화되어 있다. 대표적인 것? 컴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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