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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기철 ( http://dieBildung.net ) Date : 2008/09/20  Hit : 5202  Recommend : 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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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객체화된 정신] 3주차 - 45~47절a
2008.09.19. (金)
강의: 손동현
발표: 이원석(45절), 신기철(46~47절a)
필사: 신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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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체화된 정신은 살아있는 개인적인 혹은 공동체적인 정신으로부터 유리되어서 고립되어 있다는 점에서 일단 반죽음 상태로 들어간 정신이다. 그러나 반죽음 당함으로써 이 정신은 독자적 지속성을 갖는다. 이 독자성과 지속성을 갖는 객체화된 정신이 문화세계를 만드는 재료들이고 이것이 있어서 역사가 성립된다. 과거가 현재에서 살아나고 미래가 현재로 앞당겨진다. 이 객체화된 것이 얼마 후에 다시 살아있는 정신에 의하여 이해되고 공유된다.

존재론적 관점에서 보면 객체화된 정신은 온전치 못하다. 즉 비실재적irreal이다. 4개의 존재층 G/S/L/M에 있어 객체화된 정신에는 S, L이 없다. 살아있는 정신이 자기 몸과 생명으로써 그 중간을 채워 넣는다. 이에 irreal한 것이 다시 real한 것으로 회생할 수 있다.

*

idealism / realism

철학 이론 다 떠나서 인지활동을 생각해 보자. 우리가 감각하는 지각활동 중에 정말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을 따져보자. 이렇게 따지는 것은 플라톤에서 시작되었다. 사유작용과 감각적 지각 작용을 구분하였다.

감각작용이 일어나는 최전선에는 sense-data만 있다. 이를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quality도 아니고 qualia라고까지 이야기한다. 빨강, 파랑처럼 general한 것에 넣을 수 조차 없는 원자료를 qualia라고 한다. qualia는 나의 인식활동과는 상관없이 거기에 있는 것이 재현된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이 있다고 간주한다. 이것이 상식적 생각이요, 인식론적으로 실재론realism이다.

진짜 아는 것은 무엇이냐,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바깥에 real하게 있는 것이 진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 우리의 사유 틀에 걸러 들어온 것만이 진짜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사유의 틀은 real한 것이 아니다.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그게 뭐냐, Idee, eidos이다. 그러면 우리가 아는 것은 real한 것이 아니라 ideal한 것이다. 그래서 나오는 것이 idealism이다.

사물에 a가 있는데, 주관이 사물에 a가 있음을 알아냈다고 하자. 실재론자, 경험론자에 따르면 내가 태어나지 않았어도, 지구에 인간이 하나도 없어도 a는 있는 것이다. 그것이 상식이다. 관념론자들은 a가 사실은 Idee요, 그대로 사물res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면 a는 도대체 누가 사물 안에 집어넣은 것인가?

진짜 아는 것은 무엇이냐는 문제, 철학의 영원한 aporia이다. 여러 가지 해결 시도가 있었다. 가장 거창하게 한 사람이 누군가, 헤겔이다. 헤겔은 a를 어떤 어마어마한 놈이 넣었다고 주장하였다. 절대정신이라는 놈이. 절대정신이 사물 속에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정신이다. 물질이 아니다. 우리 주관은? 우리 주관도 절대정신이 활동하고 있는 한 단계이다. 절대정신이 자기를 외화 하여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과정이 외부세계에 대한 인간의 인식 과정이다. a는 절대정신의 그림자요, 우리의 생각도 절대정신의 단계이다. 이렇게 원스톱으로 다 해결되었다. 그런데 뭐가 문제인가? 절대정신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절대정신을 믿으면 해결된다. 그래서 헤겔 철학을 믿으면 다른 철학은 시시해서 보이지도 않는다. 헤겔식으로 푸는 것이 사실 가장 완벽하게 푸는 것이다.

제 3자 개입 없이 idea와 real영역을 나누어 놓기만 하면 두 세계는 영원히 갈라져 있을 뿐이다. 철저한 경험주의자나 자연주의자는 'idea는 사물에 비친 그림자'라고 주장한다. 경험주의자이지만 극단적인 관념주의자 버클리는 '우리가 매번 사물에 idea를 넣어준다'고 주장하였다. 우리가 넣지 않으면 그것은 없다. 두 입장은 헤겔이 보기에 모두 유치하였다. 헤겔은 idea와 real 사이를 오고가고 할 것 없이 다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헤겔은 야심이 강한 사람이다. 세계를 다 삼키려고 하였다.

몰튼 화이트 - "현대철학은 헤겔이 삼킨 것을 다 토해내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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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절. 객체화의 보존(Erhaltung)과 뚫고 들어감(Hineinragen)


a. 인간의 작품과 그것의 존속

객체화된 정신의 가장 순수한 대표자는 의심할 바 없이 문학, 시, 조형예술, 음악 등의 창작물이다. 이 밖에 각종 기념물, 건축물, 기술적 작품, 아니 어느 한계 내에서는 도구, 무기, 이용과 목적 달성을 위한 물건들, 수공업과 공업의 산물조차도 그렇다. 모든 작품에는 인간의 발명정신(Erfindungsgeist)이 고착되어 있다.

약간 확대된 의미에서는 모든 형성된 그리고 저작 속에 간직된 사상적 창작물이, 비록 하나의 완결된 저서 속에 고정시켜져 있지 않더라도 여기에 속하다. 이런 종류의 것으로는 학문적 및 철학적 세계상(체계)들, 신화적 및 종교적 직관들, 나아가서는 그 속에 역시 일정한 사고방식과 직관방식이 인식될 수 있는 한에서, 특별히 형성된 개념들이 있고, 또한 그것들과 유사한 도그마와 상징, 상징적인 것으로 높여지고 일반화한 모습들(영웅들, 신들, 운명을 짊어진 자들)이 있다. 이러한 모든 형성체에 특유한 점은 그것들이 그것들을 산출한 일정한 역사적 정신의 근본구조 - 말하자면 그 정신적 좌표계 - 를 아직도 지니고 있고, 그것을 취하는 다른 살아 있는 정신에게, 이 살아 있는 정신이 이해하는 한에서 매번 매개해 줄 수 있다는 데 있다.

이러한 모든 형성체는 살아 있는 정신이 변천하는 가운데 “보존 된다(erhalten).” 혹은 적어도 보존될 수는 있다. 그것이 보존된다는 것은 그 형성체를 만들어낸 살아 있는 정신의 존속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것은 다른 종류의 보존이다. 시, 예술, 지식은 직접적으로도 존속하지만, 이 존속은 살아 있는 정신과 함께하는 변천, 발전, 부단한 변화이다. 정신은 자꾸만 다른 것을 산출해 간다. 살아 있는 정신은 고쳐 배우고 개조하며, 밀쳐내고 새것을 만들어 내며, 버리고, 대체한다. - 이점에 본질적으로 그의 생동성(Lebendigkeit)이 있다. 이와는 반대로 하나의 예술작품, 하나의 시, 하나의 사상체계는 고정된 형태로 존속하고, 살아 있는 정신의 존속에 매여 있지 않다. 한동안 그것이 살아 있는 정신에게서 자취를 감추지만, 몇 세기 후에 다시 살아 있는 정신에게 나타나고, 새롭게 그의 정신적 산물로 될 수 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작품은 고유한 종류의 존속을 갖는다. 그리고 그것 속에 객체화된 정신이 살아 있는 인간 정신인 한에서, 이 정신은 시간을 초월해서 돌이킬 수 없는 먼 과거에서 살아 있는 현재 속으로 뚫고 들어선다. 그러나 역사성이란 것이 바로 과거의 것이 죽어서 없어지지 않고 지금 살아 있는 정신 속으로 뚫고 들어와서 이 정신 자체 속에 현재해 있다는 데에 성립하는 것이라면, 그런 한에서 객체화된 정신은 살아 있는 정신과는 다른 종류의 역사적 존재를 갖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객체화된 정신은 현재 속으로 뚫고 들어감의 근본적으로 다른 형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과거의 정신이 아직 현재에도 존재하고 있음과는 다른 양식을 자기의 고유한 존재양식(Modus)으로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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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 존속하는 데에, 즉 죽지 않고 살 남는 데에 두 가지 유형, 양태가 있다.
1) 살아있는 정신과 함께 변천한다.
2) 하나는 살아있는 정신과 별도로 하여 객체화된다.

역사 형성에 있어서는 후자가 더 많은 역할을 한다.

1) 손동현이 70년 산다고 하면 70년 동안 손동현의 정신은 존속된다. 제자들에게 '내가 생각한대로 생각하고 고대로 살어'라며 강요 하면, 손동현의 정신이 제자들에게 이어진다. 그 제자가 그 제자 다시 자기 제자에게 이어주고... 학자들이라는 것들이 대개 그렇게 한다. 그래서 제자 가지고 편 만들기 한다. 자신의 정신을 immediately하게 계속 나아가게 하려고 한다.

2) 살아있는 정신이 일단 자기를 객체화시킨다. 즉 기절시킨다. 그리고 놔둔다. 그러면 그 정신은 독자적이다. 오래간다. 생명이 이어지려면 직접적으로 이어야 하나, 정신이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매개가 필요하다. 그러니 기절시켰다가 다시 살려 내야 오래간다.

'뚫고 들어감Hineinragen' - '객체화된 정신은 반 죽어 있다가 다시 살아있는 정신에게 나타날 때 돌출된다'는 뜻이다. 과거 속에 잠자있던 정신이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난다.
hinein-들어오다.
ragen-솟구치다, 돌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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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뚫고 들어감의 방식들과 이 방식들이 서로 맞물려 있음

여기에 우리는 과거의 정신이 어떻게 해서 현재의 정신으로 뚫고 들어갈 수 있는지에 관해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방식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 두 가지 방식은 역사과정 속에서 다양하게 서로 제휴하고, 동일한 정신적 내용에 관계하지만 상호간에 광범위한 자립성을 갖고 있다. 서로는 맞물렸다가 서로 떨어져 나가고, 서로 교차하는 동시에 서로 결합하고, 서로 보충하는 동시에 서로 방해하고, 서로 제약하는 동시에 서로 제한한다.

언어는 어느 정도 살아 있는 언어로서 계속 발전한다. 몇 세기 후에도 아직 지난날의 요소들을, 아니 어휘나 구조나 개념형성마저도 변화된 채로 자체 속에 포함하고 있다. 모든 변화에 있어서 연속은 단절되지 않고, 정신적 산물의 광범위한 양이 물려받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날의 언어는 후세사람에게 그가 처음으로 배우지 않으면 안 될 외국어처럼 관계한다. 그러나 그것은 지난날의 문헌 속에 잘 보존되어서 후세 사람을 맞아준다. 그것은 이와 같이 포낭(Verkapselung)으로 싸여서 살아 있는 언어의 모든 변천에 대항하여 보존되어 왔다. 그러나 이 보존은 언어생활의 연속 속에 있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보존이다. 이 차이는 결과에 있어서 아주 잘 감지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 언어의 소속은 분명히 알 수 있고, 정신적 언어의 산물(geistige Sprachgut)은 어디까지나 재인식이 가능하다.

다른 예를 들겠다. 학문의 일정한 단계는 일정한 연구 성과와 견해 속에, 세계상 속에 고정시켜진다. 그것은 기록해 둔 정식 속에 객체화된 채 몇 세기에 걸쳐서 보존된다. 그렇지만 연구는 전면적으로 진전해가고, 지난날의 견해는 추월되고, 버려지고, 새 연구로 바뀌고 또 다시 바뀐다. 그러나 새 연구는 옛 연구의 많은 요소를 넘겨받고, 변모시키고, 개조해 왔다. 옛 체계는 아직 이해가 되긴 하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벌써 살아 있는 학문의 체계가 아니다. 옛 체계는 이중의 형식으로 산 학문으로 뚫고 들어간다. 즉, 한편으로는 넘겨받아지고, 개조된 요소들에 의하여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지나간 것으로 알고 있는 이종의 전체로서(als fremdartiges Ganzes) 들어선다.

지식의 많은 전문 분야에 있어서 들어감의 이러한 이중 형식은 큰 의의를 갖는다. 철학에서는 살아 있는 정신의 사유가 계속적으로 과거의 사상적 산물(Gedankengut)과 대결하지 않으면 안 되고, 이 사상적 산물이 저작 속에 객체화 되어서 그에게 마주해 오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다. 객체화된 것이 분실되고(verloren) 저작이 보존되고 있지 않으며, 후대인의 보고(Berichte)가 현존하지 않는 경우에는, 성과 있고 깊이 있는 대결이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정신과 그의 견해의 변천 중에는 역사적 요소들이 단지 선별적으로 포함되어 있을 뿐이고, 그 이상으로 그러한 것으로서 인식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에서는 객체화의 의미는 더욱 더 크다. 특히 개조종교(Stifterreligion)가 문제인 경우에 그러하다. 종교적 감흥은 여기서는 계시된 것으로서의 관조된 것에 의식적으로 꼭 매달린다. 종교적 감응은 관조된 것을 “성서” 속에 확정하고, 혹은 그것을 도그마(교의)로서 공식화 하고, 그 후 쭉 그 확정된 것을 먹고 살아간다. 그러나 그것은 기타의 모든 살아 있는 정신과 마찬가지로, 내면적으로 변천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어느 시기에 가서는 거듭해서 기원적(ursprünglich) -  또는 기원적이라고 생각된 - 객체화에로의 회귀 운동이 일어난다. 이 때 가장 오래된 전거(Quelle)가 표준적인 것으로 인정된다. 그리고 진보적 해석조차도 이것에 의하여 제한을 받는다. 그래서 살아 있는 전통과 전거의 고정된 내용 사이에 투쟁이 벌어지고, 전거의 권위가 무너지는 경우, 종교적 삶도 해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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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에서는 각각의 분야에 따라 과거의 정신이 현재의 정신으로 어떻게 뚫고 들어가는지를 다룬다. 일상적 문제로 환원하면, 전통 계승과 새로운 문화 창조의 관계로 볼 수 있다. 과거의 것이 기절되어 있다가 살아서 우리의 활동 속으로 들어온다. 정신 활동이 영역마다 양식이 다르다. 언어, 학문, 신앙 영역.

근본적으로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 서로 얽힌다. 특히 지식의 영역에서는 정신의 직접적인 존속은 썩 성공적이지 못하다. 한계가 많다. 2000년 전 플라톤과 우리는 별로 싸우지 않는다. 그런데 여러분과 나는 종종 싸운다. 학문이나 지식은 생생할수록 거기에는 덜 정련된 것이 많다. 식어야 한다. 뜨끈뜨끈한 상태에서 제자에게 직접 주려하다가 제자들로부터 왕따 당하기 십상이다.

언어의 경우에는 직접적인 면이 더 강하다. 직접 배워야 전승되니까.

신앙은? 객체화의 의미는 더욱 더 크다. 개조종교(맨 처음 창시한 종교)의 경우에는 더욱 크다. 왜? 믿게 하려면 시발점, 전거가 확실하게 있음을 보여주어야 신자들을 신앙 생활하도록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누구나 거기에 접근할 수 있고, 삶의 지표로 수용할 수 있다. 교주와 몇몇 제자들만 이야기를 주고받으면 종교로서 set-up이 안 된다. 그들이 죽으면 더 이상 종교는 존속 못한다.

본래 객체화된 정신이 공유, 전승되는데. 종교 활동이 인간의 사회적 활동인 만큼 왜곡될 수 있다. 그것을 잘 지키는 활동이 그것을 소외시킬 수 있다. 그래서 중간에 누군가가 나와서 혁파하고 개혁한다. 석가모니도 힌두교 혁파하고 불교 만들었다. 예수 역시 민족종교 유대교를 혁파하고 기독교를 세웠다.

객체화된 정신이 있는데, 중간에 사람들이 자꾸 왜곡한다. 그래서 루터같은 이들이 나와서 개혁한다. '원래 예수가 한 말은 이게 아니다'라며 로마 교황청 혁파하자고 한다. 자꾸 Quelle원래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어떤 것이 Quelle로 돌아간 것이냐를 따지는 것이 어렵다. 학문에서는 실재 세계와 맞추어 보면 된다. 그러면 진리/비진리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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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예술에 있어서의 객체화의 움직이는 힘

예술에 있어서 뚫고 들어가는 두 가지 방식간의 교차는 또 전혀 다르다. 한 시대의 예술은 그 시대가 산출하는 일련의 예술작품으로 다하여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살아 있는 정신의 예술적 성질, 그 감각, 취미, 보고 듣고 파악하는 그 방식을 내용으로 한다. 그러나 살아 있는 정신의 바로 이러한 예술적 성질은 자기의 역사적 변천을 넘어서 보존된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시대의 살아 있는 정신을 다시 붙잡아, 그로 하여금 자신의 역사적 입장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것을 보게끔 하는 힘을 객체화를 통해서 갖는다는 점이 특이하다.

우리가 한 예술 작품을 정말로 “예술작품으로서” 관찰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임의로 아무렇게나 관찰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그것을 벌써 일정한 방식으로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 그런 경우에 물론 각자의 파악이 활동할 어느 정도의 여지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런 한에서 작품이 그것을 보는 방식을 지시해 주며, 오직 그 방식으로만 작품이 보여 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작품은 그것을 예술적으로 보려고 하는 사람을 일정한 방식으로 보도록 강제한다. 이 강제는 자연법칙의 필연성과 같은 것이 아니고, 명령의 필연성과 같은 것도 아니다. 일반적으로 아무도 예술적으로 강제되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모름지기 그렇게 보아야 한다는 요구가 절대적인 명령으로서 제출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특수한 관조 방법을 지니고 있지 않은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작품에의 참여에서 배제된 채로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술작품에 있어서의 일정한 내용의 객체화는 언제나 동시에 정신적 태도 자체와 그것에 고유한 감수(Empfinden) 방식과의 객체화 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 객체화는 후대인에게서 그가 자신의 수용 능력을 가지고 그 객체화를 맞아들이는 한에서, 이 정신적 태도와 그 감수 방식을 다시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곧, 예술 작품은 다른 종류의 객체화된 정신 보다 더 많은 것을 수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적 사상적 산물에 깊게 몰입하는 사상가는 이 사상적 산물만을 파악하고, 그 외에 과거에 관한 여러 가지 보충적인 실질적 지식에 몰두하고 있다. 과거의 예술 작품을 대하는 예술 감상자는 직접 그 작품의 정신적 내용을 파악할 뿐만 아니라 그는 오히려 그 자신도 그 작품에게 붙잡히며, 그의 보는 방식이 바뀌어 진다. 그는 감상에 있어서 그 작품을 산출하는 사람의 정신적 태도 가운데 어떤 것을 받아들인다. 감상자는 예술가가 보던 방식대로 본다. 물론 여러 가지를 삭감하기도 하고 자신의 것을 집어넣어서 보기도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는 예술가의 보는 방식과 파악 방식대로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그는 예술 작품을 예술 작품으로서 보지 못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정신의 역사적 연속체는 객체화된 것들 사이에서 계속 움직여 간다. 전승되는 예술적 감각이 변천하고, 보는 방식이 계속 발전해 가며, 새로 나타나는 각 방식마다 새로운 작품을 산출한다. 그러나 산출에 있어서 이 방식은 제각기 작품을 자기 밖으로 내세워 그것을 자립시킨다. 작품은 정지해 있으면서, 역사적으로 작품은 달라지는 살아 있는 정신에게, 즉 다른 관조방식에게 제공된다. 그럴 때 그 작품들로부터 그 때마다 살아 있는 정신에 대하여, 작품을 일정한 방식으로 보아 달라는 일종의 요구가 부단히 나온다. 그러나 살아 있는 정신이 저마다 모두 이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어떤 작품은 기나긴 역사적 정신을 경과하는 동안 내내 잠들어 있는 채로 지내 오던 끝에, 어느 날 어떤 살아 있는 정신이 나타나 그 작품이 예술적으로 보는 태도를 발견하는 수가 있다. 그럴 때 작품의 깨어남, 재생, 살아 있는 정신 속으로의 재진입이 있게 된다. 이리하여 작품은 진입과 함께 살아 있는 정신을 계속 움직이고, 생산적이게 하고, 새롭게 한다. 객체화는 일단 다시 활성화 하면, 살아 있는 정신을 움직이는 힘이 된다는 것이 증명된다.

그리스의 예술과 시의 위대한 르네상스는 많은 실례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이집트의 조각의 부활은 우리 현대에게 직접 체험된 것으로서 기억되고 있으며, 유럽의 예술의식 내에로의 동아시아 예술의 침입도 그러하다. 순전히 그 자신의 지향에 따르고, 말하자면 그 지향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에 대해서는 눈가리개를 하고 사는 시대가 있고, 예술적 기관(Organ)이 열리고 확대되어, 자기와는 다른 정신을 표현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찾고, 발견하곤 하는 시대도 있다. 우리 시대는 후자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대게 위대한 창조의 시대는 그렇지가 않다.


*

예술에 있어서는 객체화가 영향력을 더 발휘할 수 있다. 예술작품은 살아있는 정신의 자기 투사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이해하는 차원이 아니다. 나아가 예술은 시대를 뛰어넘는다. 예술작품은 '나를 봐달라'며 외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자연법칙도 아니고 도덕적 명령도 아니다. 안 보면 그만이다. 자유공간이 더 넓다. 그래서 시대를 더 뛰어넘을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2문단
"일정한 방식으로 보도록 강제" - 같은 비너스작품이라도 목각이냐 석각이냐에 따라 질감이 다르다. 어쨌든 조각가는 자신의 정신을 예술 작품에 불어 넣었다. 예술작품은 감상자에게 어떤 방식으로 볼 것을 강제한다. 그런데 이 강제성이 그렇게 절대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이를테면 [아프로디테]와 [절규]를 보고 같은 반응을 할 수 없다. 편차가 굉장히 크다.

학문의 경우, 편차가 크면? 그 정신에 맞다고 할 수 없다.

예술작품은 재생될 때, 부활될 때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덜 받는다.

"특수한 관조 방법" - 클래식 음악을 들어서 비발디나 바흐의 정신과 만나려면, 적어도 고전적 음악이 어떻게 특징지어져 있는지 알고서 접근해야 한다. 이것이 관조의 방식이다. 지식의 영역에서는 아주 명확하다. 독일 철학을 공부하려면 독일어를 알아야 한다. 물리학 책 이해하려면 물리학에 대하여 기본적인 것은 알고 있어야 한다.

[비너스의 탄생] - 대영박물관 창고에 처박혀 있었다. 그런데 감상문을 멋지게 썼다. 신문을 읽고서 사람들이 그에 비교해보니까 맞더라. 그래서 박물관 중심에 전시되었다. 예술작품의 경우 나쁘게 말하면 편차가 크다, 좋게 말하면 자유공간이 넓다.

객체화된 정신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정신에게서 되살아난다. 자신의 identity를 갖고 온전하게 되살아나려면, 객체화될 때의 살아있는 정신의 내용이 그대로 되살아나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영역에서와 달리 예술 영역에서 객체화된 정신은, 자신을 창작하는 예술가의 정신 자체가 고정되어 있지 않고 굉장히 자유로운 까닭에, 이해의 폭을 넓게 허용한다. 그렇지만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 올 것을 강요한다. 따라서 예술작품을 이해하는 안목, 자세를 가지고 접근해야 할 것이다. 거기까지는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만 접근해야한다'는 아니다. 그런 점에서 자연법칙이나 도덕법칙과는 다르다.

예술작품은 왜 이리 자유공간을 많이 허용하는가? 창작자 자신에게 고정된 무언가가 없기 때문이다. 고정된 것일수록 예술작품의 가치는 떨어진다. 애매하게 펼쳐놓아야 예술작품의 가치는 높아진다. 즉 감상할 수 있는 이해 영역이 넓어야 가치가 높아진다.

음악가의 악상, 시인의 시상 등의 표상은 사실 지적으로 고정시키기가 어렵다. 예술적 창작은 처음 시작할 때와 끝날 때 전혀 달라질 수 있다. 처음에는 직감이 떠올라 화폭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중간에 계속 바뀐다. 사실 예술가는 자기가 뭘 하는지 모르고 한다. 의도와 목적을 확실하게 하면 할수록 작품의 가치는 떨어진다. 따라서 감상자에게도 자유공간이 허용된다.

그렇다고 예술작품이 자기에게 다가오는 아무런 길도 요구하지 않을 수는 없다.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안목은 필요하다. 그 안목은 무엇인가. 예술 감상론에서 항상 문제된다. 특히 현대 미술에 오면, 도대체 워홀인지 뭔지 하는 녀석이 그려놓은 것이 예술작품인지 알 길이 없다. 예술에 관한 학문적 탐구가 어디까지 가능할 것인가? 학문적 탐구, 있다. 음악학, 미술사 등, 예술철학도 있다.

인간의 예술 활동, 예술 작품을 학문적으로 접근하여 그 속에서 보편적인 것을 찾아내어 학문적 체계를 만드는 작업과, 예술작품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활동은 구별해야 한다. 전자의 경우 이를테면 사회학적 접근이나 경제학적 접근도 있다. 예술철학도 있다. '예술은 고정된 인지적 틀을 강요하는 활동이 아니다'를 밝히는 것이 말하자면 예술철학의 활동이다. 예술이 학문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는 것이 없느냐, 있다. 이를테면 음이 어떤 조화를 이룰 때 우리에게 정서적 쾌감, 안정감, 도발의식을 주느냐 등을 따질 수 있다. 화성악, 대위법 등. 왜 장조는 기쁜 감정, 단조는 슬픈 감정을 불러일으키는가. 법칙을 찾아내면 하나의 지식 체계로 만들어낼 수 있다.

괴테는 색채에 관한 학문적 탐구를 하였다. 화가는 그림 그려서 남들 감동시키면 된다. 그러나 색채학자는 빨강이 왜 사람 흥분시키느냐 등을 따진다.

예술에 대한 학문과 예술을 예술로서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까지 학문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것이냐이다. 대답할 수는 있겠으나, 간단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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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입장에서면 자연의 모든 것은 정신이 객체화된 것이다. 절대적 정신 A가 a로 나오는 것이 A의 Anderssein다른 모습이다. A가 제 모습을 찾기 위한 매개 장소가 인간의 정신이다. 인간의 정신에서 나갔던 것이 인간으로 다시 들어온다.

Zu-sich-selbst-zurueck-kehren정신이 밖으로 나갔다가 자기 자신에로 돌아옴

인간 정신을 통하여 돌아온다. 인간이 매개하는 것이다.

헤겔은 자연과 정신을 그러한 구도로 놓고, 양자를 모두 포괄하는 것으로 절대정신을 놓았다. 그러면 우리가 아는 것은 죄다 객체화된 것이 아니냐. 헤겔처럼 보면 그렇게도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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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절 이층성과 질료의 역할

a. 객체화의 수수께끼 같은 존재방식

객체화된 것들에 있어 보존되는 것, 존속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두 가지 추측이 제기될 수 있다 - 1) 존속하는 것은 객체화된 것들 속에서 내용으로서 형식을 획득하는 정신자체이다, 2) 존속하는 것은 하나의 질료 속에 정신이 형성한 것에 불과하다.

두 경우 모두 맞지 않다. 이를테면 작품으로서 이해된 시는 그 자체 정신적 내용이지 표현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문서의 보존은 정신적 내용의 보존과 다르다. 전자는 순전히 질료의 지속이고, 후자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다.

참된 관계는 현상 자체에서 관찰할 때 파악할 수 있다. 작품을 창조하여 작품 속에서 자신을 객체화한 정신은 죽어서 과거에 속한다. 그렇지만 그 정신은 그 작품에서 살아있는 정신과 같이 [독자에게] '말을 걸어 온다'. 여기에 형태화된 내용의 경이로움이 있다. 이처럼 표명만이 보존된다고 하면 [존속하는 것을] 너무 적게 잡은 셈이고, 살아있는 정신이라고 하면 너무 많이 잡은 셈이다.

시인이 창작한 인물은 살아있는 인간으로서 실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 속에서 삶을 이어간다. 작품을 이해하고 관조함으로써 인물은 독자 앞에서 되살아 나온다. 이는 조형예술에서도 마찬가지이며, 플라톤의 대화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말과 함께 말 이상의 것이 주어지고, 像과 함께 像 이상의 것이 주어진다. 말이나 형상에서 하나의 정신적 산물이 말을 걸어오거니와, 이것은 그 자체 말이나 像과 같은 표현 양식이 되어버리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그것[표현양식] 속에서 재인식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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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체화된 정신은 정신이다. 물질은 아닐 것이다. 돌은 객체화된 정신이 아니다. 돌일 뿐이다. 이 속에 들어가 있는 객체화된 정신이 무엇인지 알려면 돌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런데 정신이니까 돌은 아니다. 그렇지만 객체화된 물질이니 정신도 아니다. 하나를 잡으려 하면 다른 하나가 도망간다. 이게 수수께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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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보존"의 양식에 있어서의 난제

[객체화된 정신에 있어서] 보존되는 것은 글자, 두루마리 책, 조각된 대리석만인가, 아니면 인물들 및 창작되고 관조된 세계, 그리고 대리석이 "보여주는" 관조된 신체의 動態인가?

문자나 대리석보다 훨씬 이상의 것이 역사적으로 보존된다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다. 모든 이해하는 "독서"는 희랍인들이 명명하였듯이 재인식Wiedererkennen이다. 이 말에서 객체화된 정신의 존재방식에 포함된 수수께끼 전체가 명확히 파악될 수 있다. 정신적 산물은 객체화의 내용으로서 존속하고, 문자나 돌은 존속의 수단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수단은, 살아있는 정신의 재인식이 그것을 맞아들이지 않는다면, 불충분할 것이다.

실질적인 것은 객체화된 정신이 아니요 살아있는 정신인 까닭에, 객체화된 정신의 존속은 재인식이라는 살아있는 정신의 보상행위에 의존한다. 인물, 생동성 등 정신적 산물은 외면적으로 형태 지어진 형성체에 있어서 재발견되고 재인식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재발견과 재인식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객체화된 정신의 보존 양식의 난제가 발생한다.]

어떤 수고Handschrift가 수백 년 간 수도원 장서 속에 파묻혀 있거나, 고대의 신상
이 파편들 가운데 묻혀 있다고 상정해보라. 양자는 실질적 형성체인 까닭에, 보존될 수 있고 다시 발굴될 수 있다. 이때 [수고에 쓰인] 인간의 운명이 장서 속에 먼지로 파묻혀 있고, 신이 파편 속에 매몰되어 있다고 말해야 하는가? 아니면 파묻혀 있을 때에는 예술작품은 존립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발굴은 작품이 두 번째로 창작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나아가 작품의 역사적 실존은 비연속적인 것이 된다.

이에 [객체화된 정신의 존재방식을 파악하는] 다른 토대가 필요하다. 다른 측면에서 현상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는 객체화의 역사성 및 시간성 일반을 도외시하고 객체화된 정신의 특징적인 근본형을 그 자체에서 고찰함으로써 가능하다. 이로써 객체화의 - 외견상 둘로 갈라진 - 존재방식을 이해할 수 있으며, 역사적 존재에로의 통로를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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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난제, 앞에서는 수수께끼라고 얘기했다. 같은 말이다.

보존이 된다고 하는데 어떤 방식으로 보존되느냐. 이 방식도 아니고 저 방식도 아니고. 어정쩡하다. 고대 이집트 정신이 생생하게 보존되려면? 물질에 담겼는데, 물질만 특혜주고 앉혀 놨다고 보존되나. 나중에 모르면 보존되는 것이 아니다. 정신이 보존되는 방식을 따져보려고 하니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앞의 얘기 반복.

앞에서는 이게 존재하는 방식 자체가 수수께끼 같다고 하였다. 그러니 당연히 보존되는 방식도 수수께끼 같은 것이다.

5문단
"외견상 둘로 갈라진" - 얼핏 보면 이중적이라는 것이다.

2문단
내용, 수단 구별 - c 에서 계속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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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담지하는 존재층으로서의 "감각적 실질형성체"

모든 정신적 내용 또는 산물은 주관에서 분리될 수 있다. 이 내용은, 일단 객관적으로 파악되고 각인되면, 그 의미상 초시간적인 것으로 높여진다. 사상은 사고 작용이 아니요, 관조된 것은 관조 작용이 아니다. 내용은 작용 자체와는 이질적이며, 다만 작용에 '대해서'만 존재한다. 전달에 있어서 양도될 수 있는 것은 내용뿐이고, 작용은 각 주관에 있어서 그때마다 새로운 작용이다. 이때 양도를 매개하는 것이 객체화이다.

말이 벌써 객체화이다. 언어는 가능한 객체화를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요소들의 복잡한 체계이다. 명제, 판단, 정의를 통해 고정된 개념 등은 이미 특수하고도 고도로 완성된 객체화된 것들이다. 일정한 전개상태에 있는 학문이 이러한 객체화된 것들과 연관되며, 이 연관으로서만 학문은 공동소유물이 될 수 있다.

객체화는 언제나 어떤 형성체에, 다시 말해 감각적으로 지각될 수 있는 물적 실질적 형성체에 매여 있다. 객체화는 본질적으로 정신적 내용이 실질적 형성체에 얽매인다는 데에서 존립한다.

객체화된 정신은 실질형성체이다. 그런데 살아 있는 정신도 실질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객체화된 정신으로서의 실질형성체는 살아있는 정신과 관계없이 고정되어 자립적 실질성을 획득한다는 점에서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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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ist / Materie

M은 Realgebilde실질적 형성체이다. G도 사실은 real한 것이다. 시간을 탄다. 없어졌다가 생겨났다가한다. 그러니 real한 것이 real한 것 속에 담겨 있다.

[[정신적 존재의 문제]]의 용어는 상식어로 되어 있다. 'Superexistenz'외에 일반 사람들이 모르는 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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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전경Vordergrund과 배경Hintergrund의 관계

        객체화된 정신은 이층적이고 이중형성체이다. 감각적, 실질적 층(전경)은 파악하는 정신과 관계없이 실존하며, 객체화된 정신 속에 고정된 정신적 내용(배경)은 언제나 자신을 파악하는 정신에 "대해서만" 실존한다. 다시말해 객체화된 정신의 전경은 자립적이며 그 자체로 존재하는 실질적 형성체이지만 그 자체 정신적인 어떤 것은 아니다. 배경은 정신적 내용이지만, 자립적 존재방식을 가지지 않은 까닭에 언제나 어떤 재인식하는 살아있는 정신에 대해서만 존재한다.

객체화된 정신의 배경은 비실질적인 까닭에 전경의 자체존재Ansichsein(실재, 누가 보든 안 보든 있는 것)가 아니라 우리에-대한-존재Fuer-und-Sein(허재) (즉 객체화된 정신을 파악하는 살아있는 정신에 대한 존재)라는 제약된 존재방식을 갖는다. 이에 감각적 실질적인 물질이 어떤 정신적 내용의 담지자가 될 수 있는지가 문제시될 수 있다.

배경 즉 객체화된 정신의 내용은 일반적으로 "그 자체로 그 속에" 있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에게 대해서"만 있을 뿐이다. 모든 객체화에 있어서 배경층은 오직 살아있는 정신과의 상호관계를 근거로 하여 존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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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s-druck표현: Ex-pression 밖으로 누름   <-> Im-pression

erscheinen은 ersehen이 있어야 반대급부로 나타난다. 내가 들여다봐야 나오는 것이다. 칸딘스키 그림 보고 '애들이 장난쳤구만'하면 칸딘스키 생각이 나에게 표현이 안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 대해서 있다fuer-uns-sein.

객체화된 정신의 내용은 들여다볼 때에는 실존한다. 누가 들여다보든 같은 것이 보여야할 것 같다. 그런데 들여다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온전치 못해서 그렇다. 사실은 온전한 것도, 자연의 실재조차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자연 - 신이 만든 것.
작품 - 사람이 만든 것. 어설프다. 그걸 또 사람이 해석하니 더 어설프다.

객체화된 정신의 배경 - 우리가 들여다보여야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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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말과 글자, 듣기와 이해하기

말은 이층적이다. 뜻이 없는 소리는 말이 아니고, 소리가 없는 뜻은 더욱 말이 아니다. 뜻과 소리는 이질적이요, 양자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방식을 가지며 상호간에 광범한 자립성을 가진다. 이를테면 언어의 다수성, 하나의 사상이 다른 언어로 번역될 수 있다는 것, 동일언어에서 동일한 사상을 표현하는 말이 여러 가지라는 것에서 이러한 자립성을 알 수 있다.

층들이 이질적이라고 하여 층들 간의 연관이 방해받지는 않는다. 소리와 뜻은 듣기
와 이해의 관계처럼 연관되어 있다. 듣기와 이해의 두 작용도 상호간에 구속받지 않는다. 이해하지 않고 들을 수 있고(모르는 외국어를 그저 들을 때), 듣지 않고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관계를 통하여 정신적 산물이 문헌 속에 보존된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먼지 속에 묻힌 수고의 예에서 실질적으로 보존되는 것은 쓰인 것 그 자체이다. 그 속에 객체화된 정신적 내용은 살아있는 정신의 이해가 그것을 감각적으로 읽음으로써 이끌려져 일어나 정신적 산물의 재인식이 되어 다시 떠오른다. 이에 객체화의 배경층이 다시 소생하고 실질성으로 끌어올려진다.

이들의 관계가 본질적이거나 내면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낱말, 언어, 문자에 있어서 관계는 거의 일반적으로 단순한 협정에 의한 관계이다. 일정한 음향에서 왜 그 음향이 일정한 것을 의미해야 하는지를 간취할 수는 없다. 특정 언어가 역사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만이 하나를 다른 것과 결합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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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배경 구분은 회화, 조각작품 가지고 따지면 더 선명하다.

객체화된 것에는 말도 있고 음악도 있고, 다양하다. 말, 글의 차이를 존재론적 관점에서 보면, 객체화된 저 Gebilde의 구조의 차이로 이해하면, 말과 글의 차이가 문화생활에 있어서, 지적 활동에 있어서의 차이를 더 확실히 이해할 수 있다.

말 안하고도 이해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염화미소.

소리와 말은 다르다. 소리는 의미가 실리지 않은 것이고. 말은 의미가 실린 소리이다. 옛날 어떤 사람은 '그걸 말이라고 하냐. 그건 말이 아니고 그저 소리다'라는 농담 했었다.

따분한 강의는 소리만 들리고 이해는 안 된다. Subjekt가 Materie전경까지만 가고 Geist배경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베르그송,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에 관하여] - 우리가 넋을 놓고 있으면, 괘종시계가 치는 것을 듣고도 몇 번 쳤나 기억 못한다. 듣기만 하면 그렇다. 하나는 듣고 하나는 그걸 붙잡아서 차곡차곡 얹혀서 다섯 번 쳤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의식의 지속성 맥락에서의 이야기이다. 하르트만 맥락에서는 M까지만 오고 G까지 안 간 거라고 볼 수 있다.

왜 어떤 소리가 어떤 의미를 담는가. 모른다.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특정언어가 역사적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에는 이유가 없다. 그런데 문자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 있다. 문자와 의미의 관계를 잘 파악할 수 있는 문자가 한글이다. 의도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지구상 여타 모든 문자는 우발적으로 생겨났다. 문자와 의미상 차이가 없다. 한글은 문자체계와 의미체계의 연관성이 깊다. 문자와 음성, 의미semantic가 다 연관된다.

애니콜 한글 입력 시스템, 천지인 세 개 가지고 다양한 모음을 만들 수 있다.

심산동상을 볼 때, 직접 들어가는 놈은 개인적 정신이다. 그런데 뚫고 들어갈 수 있는 힘도 안목도 능력도 공동의 자산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수묵화를 감상하여 객체화된 정신까지 뚫고 들어간다면 이는 개인정신만의 활동이 아니다. 당대 정신의 총아일 것이다. 물론 예술에 있어서는 개인의 정신과 객관 정신의 관계가 다른 영역과 다르다. 개인정신의 활동 영역이 훨씬 넓다.

personaler Geist와 objektiver Geist, 둘이지만 실은 하나이다. 측면이 다른 것이다. 공동자산이 있어야 이해도 넓어진다. 그러니 공부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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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절 예술작품에 있어서의 층들의 결합

a. 미적 대상과 그 가치

이층성현상은 객체화의 모든 종류를 포섭한다. 예술영역에서 그 다양성을 볼 수 있다. 이는 창조하는 작용에 대한 분석에 매달려 있는 미학의 관점이 아니라, [창조된] 대상의 측면에 파악함으로써 가능하다.

사실 미학적 문제 영역에서 대상을 향한 태도가 처음부터 자연스러운 태도이다. 예술적 가치는 작용이 아니라 대상에만 걸려 있기 때문이다. 예술작품만이 유일하게 아름다운 것이다. 예술작품은 살아있는 정신이 창조한 객체화된 정신으로 그것을 만든 정신보다 더 오래 존속하며, 객체화의 특징적인 존재방식을 가진다.

예술작품의 질료는 그 형성체와 함께 전체형상의 일종의 전경을 이루고, 배경과 구별된다.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전자는 실질적이고 후자는 비실질적이다. 그러나 앞에서와 달리 양자의 관계는 보다 내면적이고 보다 깊어서 보다 수수께끼 같은 관계이다. 언어처럼 단순 협약 관계가 아니다. 감각적으로 형태지어진 것을 다른 형태지음으로 번역할 수도 없다. 따라서 예술작품은 한 내용의 한갓 표현에 불과하지 않다.

그렇지만 원리상으로는 언어에서의 근본관계를 예술작품에서도 동일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 관계를 규정하는 것은 존재방식의 동일한 이질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이질성이 예술적 가치를 나타내는 근본조건이다.

이에 예술을 질료의 종류에 따라 구별할 수 있다. 질료의 종류는 제각기 전경형성의 일정한 방식을 허락하고, 전경형성의 각 방식은 제쪽에서 또 배경형성에 있어서의 일정한 방식과 선택을 지시한다. 양자는 전체 형성체가 지니는 예술적 가치의 특질을 규정하는 데에 중요한 구실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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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rdergrund전경을 요렇게 뚫고 들어가면 요러한 Hintergrund배경과 만나게 되어 있다'. 그것이 학문의 세계이다. 기껏 하르트만을 읽고 하이데거 식으로 이해하면 책을 잘못 읽은 것이다. 수학책이나 과학책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전경과 배경 사이에 필연적이지는 않아도 고정된, 안정된 통로가 있어 양자 간의 관계를 규정한다. 규정력이 loose한 영역도 있다. 예술이다. '어디로 들어가면 어디로 도달 한다'가 딱히 없다. 46절에서 보았듯이 예술작품은 감상자에게 어떤 방식으로 볼 것을 강제한다. 그렇지만 그 강제력은 절대적이지 않다.

같은 예술영역에서도 청각예술, 시각예술, 시각예술에서도 회화, 조각의 규정력이 모두 다르다. 이러한 예술작품 구조분석의 틀을 가지고 동양화와 서양화를 비교할 수 있다.

시에 있어 활자는 그것의 예술적 가치를 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서예미학에서는 활자가 영향을 준다. 시보다 복잡하다. 나아가 제일 복잡한 예술은 연극이다. 시도 있지, 회화도 있지, 음악도 있지, 모든 영역이 다 들어가 있다. 게다가 연극에서는 전경 자체가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다. 관객도 사람이고. 그래서 연극과 같은 종합예술은 고도의 예술이다. 연극을 잘 기획한다는 것은 정말 어렵다.

예술의 장르마다 예술작품 존재분석 틀을 가지고 접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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