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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기철 ( http://dieBildung.net ) Date : 2008/10/08  Hit : 5189  Recommend : 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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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객체화된정신] 4주차 - 47b~48절
2008.09.26. (金)

강의: 손동현
발표: 신기철, 박주영
필사: 신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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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절 예술작품에 있어서의 층들의 결합 - 신기철 발표

b. 조각. 정지한 형식과 관조된 운동

움직이는 자태를 표현하는 예술작품을 생각해보라. 춤추는 사람, 격투하는 사람, 원반 던지는 사람 등 공간형태에 있어서 한 순간이 고정되어 있다. 그런데 감상자들은 그 조각품에서 움직임을 본다. 즉 실제로 있는 것 이상을 본다.

감상자들이 조각작품에서 보는 움직임은 비실질적이다. 그 속에서 운동이 일어나는 공간과 자태들 자체의 생동성과 인간다움도 비실질적이다. 이들은 그자체로 존립하지 않는다. 관조자가 예술적으로 관조하는 한에서 그에 "대하여"만 존립한다. 이 움직임은 형태 지어진 돌의 생명 없는 경직성을 관통하여 관조되는 생명이다. 그것은 조형적 형태속에 "현상"하지만, 속여서 마치 실질적인 양 여기게 하지는 않는다. 현상하는 생명일 뿐이다.

조형작품에 있어 본질적인 것은 바로 이 현상하는 생명이다. 이 생명이 경직된 형태 속에 "현상하는" 한에서만 이 형태가 예술작품이라고 불릴 수 있다. 작품의 본래적 내용으로서 전경 속에 현상하는 것은 배경층이다. 이처럼 형성체는 이층적이다. 돌의 실질적 형태는 관조자로부터 독립된 존재를 갖지만, 운동과 생명은 예술적으로 이해하는 정신에 "대해서" 만이 존재를 갖는다. 즉 자체존재를 가진 것이 아니라 정신에-대한-존재를 가졌을 뿐이다.

조각작품의 배경으로서 현상하는 성분이 정신적 산물일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생명이나 운동은 그 자체로 정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정한 내용만이 아니라 그 내용이 보여지고 이해되는 방식도 함께 객체화된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사람들은 '도리포로스'를 봄으로써 [제작자] 폴리클레토스가 본 것을 보며 그가 '어떻게' 봤는지도 본다. 보는 방식과 보여진 것을 感得하는 방식이 본래 시대의 예술적 생명을 이룬다는 것을 고려하면, 배경이 드러내는 것은 탁월하게 정신적인 것이요, 그 속에 보존되어 있거니와 후세에 현상하는 것은 예술적 정신임을 알 수 있다.


*

정지한 것에서 정지한 것이 아닌 운동하는 것을 보니 그 이상을 보는 것이다. 가만히 있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곧 원반이 날아갈 것 같은 동작을 보는 것이다. 이 동작은 나에게 감각적으로 주어지는 real한 것이 아니라, 내가 들여다 보는 것이다. 내가 머리 속으로 상상하는 것이다. 하르트만 용어로는 '꿰뚫어보는 것'이요, 따라서 정신적인 것이다.

원반 던지는 사나이 모습이 신체적인 것이지 뭐가 정신적인 것이냐. 정신이 저 혼자 자기를 드러낼 길이 있는가, 그러면 귀신이다. 정신이 자기를 드러내려면 사람 등 신체를 통해서 드러내야 한다. 그러니 두 단계를 거치는 셈이다. 1) 고정된 사물을 통해 신체 움직임을 보고, 2) 신체 움직임을 통해 원반 던지는 사나이의 정신을 본다. 하나 더 있다. 창작자의 정신이다. 객체화된 정신을 만난다는 것은 그 창작자의 정신을 만난다는 뜻이다. 거기까지 꿰뚫고 들어가야 한다. 그러니 배경이 다층적이다.

인형을 볼 때, 인형의 정신을 보게 되고, 더 파고 들어가 인형을 만든 사람의 정신을 만나야 한다. 배경의 다층성이 간단하지가 않다. 예술 장르마다 다르고, 대상에 따라 다르다. 그래서 제일 어려운 것이 자화상이다. 제일 미묘하다. 작가가 자기 얼굴을 그렸다. 층구조가 가장 미묘하다.

연극이 또한 제일 복잡하다. 여러가지가 뒤섞여 있다. 소도구에도 시나리오 작가의 정신이 배어난다. 배우에서도 드러난다. 그런데 작가가 표현하려던 것을 배우가 온전히 표현한다는 보장이 없다. 때로는 그 이상으로 표현한다. 사태는 매우 복잡해진다. 음악 감상을 할 때에는 같은 협주곡이라도 어떤 오케스트라냐, 지휘자냐에 따라 달라진다. 바흐, 베토벤의 정신의 변양이 생긴다.

그런데 감상자도 문제다. 어떤 이는 온전히 받아들이고 어떤 이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irreal하다.

was / wie
원반 던지는 사나이의 고정된 상태를 감각적으로 지각하면 그의 동작을 상상한다. 힘차게 던지는 그의 신체적 동작을 통하여 우리는 원반던지는 사나이의 정신was을 본다. 그런데 그 정신을 통하여 그 조각을 통해 표현하고자하는 조각가의 정신을 본다. 그 조각가가 '어떻게' 보았는지를 보는 것이다wie.

배경이 네 층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전경 - 돌
배경 - 사람이니까 층이 네개이다. 그 네개의 층은 모두 비실질적irreal이다. 그의 물질, 생명, 영혼, 정신이 있다. 이 네개의 층을 다시 뚫고서 창작자의 정신을 본다. 하르트만은 이렇게 까지 세분화하지는 않는다. 이들을 묶어 배경Hintergrund이라고 하였다.

내가 바이올린 연주를 감상한다. cd로 듣는 것은 공연장 가서 듣는 것과 matrix가 다를 것이다. 연극보는 것과 영화보는 것도 다르다. 시 한 수를 읽으면서 시인의 정신을 만나는 것과, 연극 작품 감상하면서 만나는 것은 다르다. 그러니 예술을 영역에 따라 학문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복잡하다.

하르트만은 문화적 산물이 죄다 객체화된 정신이라고 하였다. 객체화된 정신의 전경과 배경을 파악하는 것이 문화적 산물을 존재론적으로 밝히는 다시 말해 문화존재론Kulturontologie의 첫 단계일 것이다.


*

c. 회화. 현상하는 공간과 현상하는 빛

동일한 관계가 상위를 달리하여 회화에서도 나타난다. 다만 층들간의 존재적 차이가 더 명료하게 파악될 뿐이다. 캔버스위의 색채라는 이질적 재료 속에서 비실질적이지만 구체자로서 현상하는 생명, 다채로운 인간적 충만이 있다.

이차원의 캔버스에 삼차원의 공간이 등장한다. 그림이 전혀 다른 완전한 공간성을 가시적으로 만들고 마법으로 나타나게 한다는 것이 그림의 특질이다. 빛도 마찬가지이다. 그림 위에 비추어지는 실질적 빛은 그림 속의 빛이 아니다. 현상하는 빛이다. 그러나 바로 현상하는 빛으로서야 그것은 표준적인 빛이다. 바로 이 빛 속에서 조각의 형태들이 현상하고, 현상하는 그림의 공간속에 표현되는 모든 것의 다양한 형태들이 현상한다.

예술적 관조자는 실질적으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본다. 그려진 풍경은 실제의 풍경이 아니요, 초상화는 인간이 아니다. 풍경은 관조자의 눈에 대해서만 존립한다. 예술가역시 실질적 풍경을 만들지 않는다. 그는 풍경을 묘사함으로써 일정한 방식으로 보는 자에게 그것을 보여지게 만들고 그가 제작하는 실질형성체 속에서 그것이 현상하게 한다.

이 현상함에 실질형성체를 바라보는 주관이 속해 있다. 예술가는 직접적으로 전경 즉 실질형성체만을 형성할 수 있으나, 그것을 관조자에게 풍경이나 인물로 보여질 수 있도록 형성할 수 있다. 예술가는 그가 형성하는 실질적인 것에 대하여, 형태형성 자체의 방식에 있어서 그 실질적인 것 속에 현상해야 할 다른 것에 대한 투명성을 부여한다. 예술가는 관조자의 눈을 강제하여 실질형성체를 관통하여 그 속에 표현된 것을 관조하도록 한다.

예술가는 관조자로 하여금 관조자가 자기 힘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만든다. 이 힘 즉 현실적인 것의 구체적 충만에 있어 하나의 비현실적인 것을 보게 하는 힘이 예술가의 기량이다. 실질적으로 현존하지 않는 배경이 관조적 파악에 대하여 실질형성체를 관통하도록 보여지도록 되는 데에 작품의 예술적 가치가 존립한다.

이에 내용적, 대상적 형성체가 현상을 얻게 될 뿐만 아니라, 보고 느끼는 방식이 전경의 형태에 의하여 동시에 규정되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 의미에 있어서만  정신적 산물의 객체화가 문제로 된다고 주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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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질형성체라는 말이 거듭 나온다. 사물적 구성물이다. 창작자가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만들었을 때 우리가 감각적으로 나타나는 대상이다. 다시 말해 전경Vordergrund이다. 회화에 있어서는 캔버스로부터 우리가 지각하는 것 모두 - 조명, 색채, 구도 등 - 이다.

5문단
"실질적으로 현존하지 않는 배경이 관조적 파악에 대하여 실질형성체를 관통하도록 보여지도록 하는 데에 작품의 예술적 가치가 존립한다." 예술적 가치를 감지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예술가는 쓸모 없는 인간이다. 일테면 플라톤? 플라톤이 생각하는 Idea 속에 하르트만은 예술적 가치도 집어 넣은 셈이다. 도덕적 가치, 예술적 가치도 있다고 보았다.

행위예술 - 작가 스스로가 전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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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음악. 소리와 소리의 연속, 음향적으로 들음과 음악적으로 들음

음악에서는 사정이 다르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표제음악(Programmusik, [사계], [전원] 등 일정한 주제 및 내용을 표현하는 음악) 즉 시를 주제로 한 작곡, 오페라, 종교음악의 경우 외부로부터의 주제나 내용이 진정한 음악적 내용으로 인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분야로부터 어떠한 대상적, 물적, 인간적 주제도 갖지 않는 순수음악도 있기 때문에 위의 입장이 성립하기는 어렵다. 순수음악을 통한 마음의 정조seelische Stimmung가 객체화된 정신적 내용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그러나 音曲의 순수한 음악적 구성이 그 자체에 있어서 벌써 층을 이루고 있는 하나의 형성체는 아닌 것처럼 이 입장 역시 성립하기 어렵다.

음악에서도 하나의 '감각적으로 들린' 실질적 음의 구성체(전경)와 '음악적으로 들린' 음의 구성체(배경)가 구별된다. 우리는 하나의 악장의 통일을 전체로서 감각적으로 [한 번에] 들을 수는 없다. 감각적으로는 차례차례로만 들을 수 있다. [음악을 감각적으로 듣는] 현재의 순간에는 감각적으로 들리지 않는 것이 아직 현전해 있고, 게다가 현전해 있는 것으로서 본질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음악을 음악적으로 듣는 것은 한 구성의 음악적 통일을 청취하는 것이다. 이 통일은 한 순간에 들리는 것이 아니요 순차적으로 들리는 가운데 그 작품의 고유성을 이루고 악장을 결합하여 전체성을 이룬다. 우리는 감각적으로 순간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내면적으로는 지나간 소리 곁에 있으며 동시에 다음에 올 소리 곁에 앞질러가 있다. [그럼으로써 그 작품의 음악적 통일을 청취한다.]

엄밀히 구성된 악곡에서 전체성은 시간의 경과 속에서 점차 구축된다. 감각적 음향의 연속이 끝날 때 이 전체성은 완전히 함께 모인다. 이에 음악적 들음은 단순한 음향적 들음과 달리 종합적 들음, 통일과 전체성을 합쳐서 들음이다. 이에 음악적으로는 감각적으로 듣는 것 보다 이상의 것을, 다른 것을, 훨씬 큰 것을 들을 수 있다. 이 다른 것이 본래의 음곡, 가곡, 둔주곡(푸가), 교향곡이다.

이 다른 것이 전체구성으로서 하나의 전형적 배경형성체이다. 음향적으로 비실질적인 것이요, 음의 집합으로서도 실현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성의 통일성과 전체성 즉 구성의 내면적 형태를 현상시키는 감각적 음향계열의 힘이 음악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성립시킨다. 다시 말해 전체성에로의 결합은 순전히 배경의 소관사항(작곡가에 의한 곡의 내면적 구성)이지만, 이 전체성은 감각적으로 들을 수 있는 음향계열이 시간적으로 각각 떨어져 있음으로써 현상할 수 있다.

음악에서도 [다른 영역과] 동일한 이층성, 존재방식의 동일한 이질성이 문제되고, 감각적 재료에 있어 내용의 동일한 현상함과 전경의 동일한 투명성이 문제된다. 그러나 음악에서는 층들 상호간의 내면적 결합이 독특하게 나타나며 배경형성체 자체의 성격도 독특하다. 음악에서는 듣고, 이해하고, 느끼는 방식이 탁월한 의미에서 내용을 함께 규정하며, 또는 내면적 형태의 전체성에서 일의적으로 규정되고 지시되어 있다. 이것이 음악 그 자체의 특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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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음악 모두에 객체화된 정신이 있다. 표제음악에는 좀더 의도적, 작위적, 주제적, 명료하게 드러난다. 순수음악에서는 모호하게, 그러나 강렬하게 드러난다.

이 점에서 예술과 외설은 분명하게 구별된다. 외설은 G/S/L/M 중 신체까지만 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술작품을 외설적으로 보는 이도 있고 외설을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사람도 있다.

음향 -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소리. 순간순간 들을 뿐이다.
음악 - 그 배경으로부터 우리가 감상해내는, 귀가 아니라 마음으로 듣는 소리. 감각적으로 주어지는 음향을 마음 속에 담아서 이전과 이후의 음향과 연결지어 전체가 하나의 통일적 정신적 산물이 되게끔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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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시. 형성된 말과 창작된 인물

시에서는 전경과 배경의 관계가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 말, 문자를 재료로 삼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다른 예술보다 예술외적인 객체화에 더 가까이 있다.

시의 대상은 인생에서 체험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운명, 열정, 인물, 인격들 모든 것이 형성된 말에서 직관적으로 현상한다. 실질형성체인 시에 등장하는 인물, 운명 등을 실질적인 것으로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시의 소재가 현실에서 취해졌을 때조차 사람들은 비실질성을 알고 있다.

시에서는 층들간의 구별이나 층들의 존재방식간의 이질성이 완전히 익숙하다. 또한 현상관계와 창작된 내용에 대한 말의 투명성도 철저히 숙지되어 있다. 시는 창작된 인물들을 가지고 창작된 세계를 형성된 말 속에서 현상하게 하는 위력을 발휘한다.

시에서는 전경과 배경간의 관계가 간단하게 간파된다. 그러나 극예술에서는 사정이 복잡하다. 재생산하는 예술가인 배우의 연기가 쓰인 말과 내용 사이에 삽입되기 때문이다. 무대 위에서 연기가 '보여지는' 까달게 연극에서 실질형성체의 영역은 확대된다. 무대상의 배우는 실질적이고, 감각적으로 체험된다. 이에 동작 전체가 실질성안으로 끌어들여져서 실질형성체 속에 현상할 비실질적 배경에게는 아무런 활동여지가 없다는 이의가 제기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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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예술로 보아야 할까? 전경을 통해 배경이 드러난다는 것은 다른 예술과 같다. 그런데 다른 예술에서는 전경이 굉장히 중요하다. '감각적으로 주어지는 물질적인 사물'에 전경을 제한하면 시에서 전경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종이 재질, 폰트 정도의 차이만 있다. 게다가 그것들이 시의 예술적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 시에서는 전경, 배경의 구분이 간단한 반면에 전경의 역할이 미미하다.

무엇이 정신을 담아내는 매개의 역할을 하는가? 말이다. 운율, 정확히 말하면 어휘의 배열이다. '어떻게 어휘를 구성하였는가'이다, 'geformte Wort'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 각각의 단어는 '술', '익다', '마을'... 그런데 이들을 붙이니까 각각의 단어가 전혀 갖고 있지 않던 분위기를 만들고, 그로부터 박목월이라는 사람의 정신이 배어 나온다. 시인은 어휘 배열, 구성에 있어서 마술을 부리는 자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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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극예술. 무대의 실질성과 동작의 비실질성


위의 이의는 부당하다. 근본관계는 동일하다. 내용상 혼잡할 뿐이다. 시에서는 비실질적이고 배경에 속한 것의 일부분이 연극에서 전경으로 편입되어 실질성으로 끌어올려져 있지만, 이것이 배경형성체 전체에 관하여 타당하지는 않다.

무대상의 구상적인 것, 가시적 연기, 대화는 실질의 영역으로 들어가서 덧없는 것이 된다. 연기는 순간의 소행이요, 불안정하고, 고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작품의 상연은 각각 새로운 추창작Nachschoepfung이다. 쓰인 것(극시)과 그 속에 고정된 것만이 안정되어 있으며 본래 작품의 통일성은 여기에만 있다.

인물은 무대 위에서 실질성의 형식을 취한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덧없어진다. 무대연출의 사실성Realismus은 순간에 매여 있음과 순간과 더불어 쇠멸함이라는 대가를 치름으로써 얻어진다.

그러나 동시에 여기에서 무대의 사실주의Realismus의 한계가 드러난다. 인물은 무대 위에서 실질성의 형식을 취하고 나타나지만, 그들 자신이 실질적으로 되지는 않는다. 거동에서의 가시적인 것만이 실질화될 뿐, 그들의 증오와 사랑이나 운명 등이 실질적으로 연기되지는 않는다. 이에 배우의 동작을 실질적인 것인 양 착각하는 데에 연극의 미학이 있다고 하는 착각설이 제기되었다. '마치 실제로 있는 것처럼 보여줌'으로써 관객에게 전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였다. 즉 관객은 갈등과 고뇌, 사악함, 파멸, 살해 등의 증인으로 있어야 한다. 비극적 연기의 의미가 이로 인하여 전도될 것이다.1)

무대 위의 사건들의 비실질성에 관한, 연기되는 동작의 본성에 관한 자명한 인식, 즉 관객이 배우와 배역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 무대상의 동작에게 투명함을 부여한다. 배우의 연기만이 실질적인 것이고, 그 연기 속에서 운명과 열정의 엄숙함이 관객에게 현상한다.

사실주의의 과잉은 예술적으로 보고 듣는 것을 방해한다. 인물들 및 운명과 함께 배경이 현상하는 것은 예술적으로 보고 들음에 '대해서만' 성립하므로 사실주의의 과잉은 미적 대상 자체도 함께 파괴한다. 배역상의 운명이 배우의 운명이 되는 경우나 연기된 질투의 배후에 진짜 질투가 있음으로 인하여 '연출된 즐거움이 현실의 공포로 돌변하는 것'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연극에서도 다른 분야와 동일하게 이층성을 파악할 수 있다. 실질적 연기 속에 비실질적인 것이 현상한다. 연극표현의 본질은 마치 실제로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요, 비실질적 내용을 현상으로서 관조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곧 객체화이다.

1) 비극은 파국적인 결말에 치달았을 때 관객으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이것이 곧 비극이 주는 연민과 공포에 의한 감정 정화이다. 만일 관객이 눈앞의 연기를 연기로서 보지 못하고 실제로 일어나는 것으로 착각한다면, 그는 파국적 결말을 보고 충격에 사로잡힐 뿐 그로부터 어떠한 감정 정화도 얻지 못할 것이다.


*

두 줄짜리 시도 있다. 연극과는 엄청 차이난다.

복잡해서 그렇지 설명이 시보다는 용이하다.

예술적 가치는 뭐냐, 인간을 단순한 현실에서 고양시킨다. 인간을 초월하게 만든다.

예술작품으로서 정말 성공하려면 관객이 거기에 몰입해야 하고, 그러면서도 저것은 연극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연극에서는 전경, 배경의 구분이 그리 쉽지 않다. 특히 배우. 배우의 연기에서 어디까지가 전경이고 어디가 배경인지 말하기가 간단하지 않다. 배우(전경)에만 주목하면 배역(배경)에 대한 감상이 쉽지 않다.


*

g. 객체화로서의 건축의 지위

건축에서는 공간적 형식, 질량의 정태학, 건축계획, 건축기술 등은 모두 실질형성체로 간주될 수 있다. 배후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거대하지도 않은 특정 건축물은 '위대하다는 인상을 주고', 특정 건축양식 속에는 특정한 민족적 성질이 나타난다. 그 위대함은 현상하는 위대함이지 실질적인 거대함이 아니다. 민족적 특질도 현상하는 특질이다.

건조물을 볼 때 직접적으로 광학적으로 보아서는 알 수 없는 통일된 전체인상이 결합된다. 즉 배후에 어떤 종합적인 봄이 나타난다. 이는 예술적으로 보는 것이요 그 내용은 구성물의 내면적 형태이다. 이는 우리가 보는 것에 '대하여' 대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요,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의 작품에는 제작하는 인간의 정신이 드러난다. 인간정신은 건조물 속에도 자신의 정신을 객체화한다. 다만 재료가 근본적으로 다르고 독특하여 그림이나 문자에서와는 다른 언어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

건축 예술의 독특한 점이 또 있다. 건축 예술을 감상만 하지 않는다. 그 속에서 산다. 예술과 기술이 통합되어 있다. 예술이면서도 동시에 과학적으로 뒷받침된 기술이 들어간다. 뿐만 아니라 생활의 실용성도 들어간다. 그래서 종합적이다.

'질량의 정태학' - 구조물로 이해하면 된다.

건축물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보려면 총체적으로 보아야 한다.

건축의 경우 건축가 개인의 정신보다 공동정신이 반영된다. 사람이 들어가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당대의 공동정신이 반영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건물은 암암리에 거기에 사는 사람의 정신에 영향을 끼친다.


*

48절 미학을 위한 결론 - 박주영 발표

[발표문 파일 소실]


a. 층들과 현상관계의 다양성

전경과 배경의 접속 방식이 다양해짐으로써 예술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예술에 있어 장르의 다양함, 같은 장르에서도 표현의 다양함은 전경/배경 접속의 다양함에서 유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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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예술에 있어서의 층접속의 변화(Abwandelung변양, 변전)

회화, 음악에서는 전경이 중요하다. 시에서는 전경이 별 역할 하지 않는다. 재료의 규정성이 약하다. 조각은 재료의 규정성에 거의 구속된다. 언어는 그 언어를 어떻게 빚어서 구성했느냐가 중요하다. 다양하게 구성할 수 있다.

Ideales Sein 보편적, 불변, 초시간적
Reales Sein 개별적, 가변, 시간적

Ideales Sein으로 하르트만은 네 가지를 제시한다. 본질, 수(적 질서, 수학의 세계), 논리성, & 가치.
Reales Sein - G/S/L/M네 개의 존재층으로 되어 있다.

우리가 빚어내는 세계는 어떤가? 우리 스스로 법칙과 원리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 이미 있는 원리와 법칙에 따라 빚어낼 수밖에 없다. 인간이 빚어내는 문화적 세계도 인간에게 주어진 세계의 원리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인간이 빚어내는 세계도 네 개의 존재층일 수밖에 없다.

Ideales Sein / Reales Sein 간에 관계가 없을까? Ideales Sein은 Reales Sein에 내재한다immanent. 사물의 본질, 수적 관계, 논리성은 모두 세계 안에 내재해 있다. 물론 논리성에 대해서는 사유 법칙이 존재 법칙에 내재해 있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런데 하나 독특한 것이 있다, 가치. 가치는 처음부터 현실세계 속에 있지 않다. 우리가 있게 하면 있다. Ideal한 것을 Real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realize실현, 구현이다. 그러려면 인간의 활동이 필요하다. 그것이 정신이 자기를 객체화시키는 문화 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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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층들의 구조적 다양성에 있어서의 존재방식의 이원성

앞내용 재정리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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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미적 가치의 독특성 [아름다운 것]의 본질

미적 가치는 보는 사람이 보지 않으면 이것이 있다고 말하기 제일 어려운 가치이다. 존재지반이 가장 취약하다. 미적 가치가 우리의 실질적인 현실을 구속하고 규정하는 일은 별로 없다.

어떤 가치든 독립적으로 실재한다. 그런데 실현되려면 우리가 쳐내야 한다. 가장 자체성이 약한 가치가 미적 가치이다.

Ideales Sein네 가지 중 세 가지는 사물 자체 안에 내재해있지만, 가치는 위에 붕붕 떠다닌다.schwebende Werte부유하는 가치이다. 이에 현실을 제어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 도 있다. 우리가 realize하면 제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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