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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기철 ( http://dieBildung.net ) Date : 2008/12/01  Hit : 5798  Recommend : 559   
 [철학적인간학] 14주차 -上
08.12.01. (월)

강의: 손동현
발표: 이상훈
필사: 신기철

*

"자연조건들은 의사의 규정 자체에는 관련하지 않고, 단지 현상에서의 그것의 작용 결과와 성과에만 관련한다. ... 이에 반해 이성이 발언하는 당위는 그 의욕에 대해 척도와 목표, 금지와 권위를 세운다. 그것은 현상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사물들의 질서를 따르지 않으며, 완전한 자발성을 가지고 이념들에 따라 고유한 질서를 만든다." - [[순수이성비판]] A548 B576 -

자연조건들, 일테면 내가 이런 신체 조건을 가지고 있고, 꼬집으면 아프고, 눈 나쁘면 안경 써야 하고 등의 자연 조건들은 의사의 규정 자체에는 관련하지 않는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겠다는 나의 결심에는 관련하지 않는다. 자연조건들은 단지 현상에 있어 의사의 작용 결과와 성과에만 관련한다. 즉 '내가 오늘 뭘 해야겠다'하고 마음 먹으면, 나는 현상에 속하는 내 '몸'을 움직인다. 내 의사에 따른 작용 결과는 자연 조건들 속에서 전개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작용결과와 성과에는 자연조건들이 관련한다. 그러나 의사 규정 자체에는 관련하지 않는다.

나는 오늘 피곤하지만 수업에 참여하기로 마음 먹는다. 자연조건들은 신체의 피곤함이라는 악조건이지만, 스스로가 스스로를 정하는 내 마음은 오기로 수업에 참여하겠다고 마음 먹는다. 그래서 마음만 딱 먹으면 강의실에 딱 나타나는가? 전철을 타고 버스를 타야 한다. 그러한 사건들은 철저하게 자연 조건 아래 있다. 이렇게 설명하면 곧장 반론이 제기된다. 너는 몸과 마음이 따로 노냐? 한 삼 일만 굶어봐라, 그래도 마음과 몸이 따로 놀 것 같으냐? 칸트에 따르면 몸과 별개의 독립적인 다른 세계가 있다. 다른 세계가 있으면 뭐가 좋을까? 이 별개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으면 도덕을 설명하기가 어려워진다는 난점에 직면한다.

내가 신체적인 여건들을 규정하는 자연 법칙들에 전적으로 복속되어 있어서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자유 영역이 없다면, 나의 행위는 철저하게 자연 법칙의 결과에 불과하다. 이에 내가 옆에 있는 사람을 죽였다고 하여도, 옆에 있는 사람을 죽인 것은 내가 아니다. 자연 법칙이 죽인 것이다. 인과 필연적 사건들이 옆 사람을 죽인 것이니 자연법칙적으로 따질 일이지 도덕적으로 따질 일이 아니다. 이에 나에게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 나에게는 잘못 없다. 잘못을 물으려면 자연 법칙에게 물어야 한다. 그러면 도덕적으로 책임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러니 자유의지가 필요하다. 이는 도덕적 요구이다. 아니면 다 같이 도덕적이기를 포기하고 짐승으로서 살아가야 한다. 자유의지가 있음은 도덕적 요구이지 논증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칸트는 논증하려고 애썼다. 실은 순환 논법이었다. 그렇다고 칸트가 논증 하지 않고 선언만 했으면 철학 이론으로 정립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칸트의 주장은 아래 두 주장으로 집약된다.
1. 자유의지는 내 자아 내에서 직접적으로, 무매개적으로 발견되는 근원적 사태이다.
2. 자유의지는 인간의 삶을 위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요청이다.

이 두 주장을 그냥 선언 하면 될 것을 칸트는 어렵게도 논증하였다. 칸트는 의지의 자유를 실천 법칙을 가지고 증명한다. 그러나 순환 논법이다. 칸트에 따르면 의지의 자유가 있다는 것은 실천 법칙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실천 법칙은 실천이성이 안다. 그것이 의지의 자유이다. 논증이 안 된다. 처음부터 믿을 놈 오고 말 놈 가라고 해야 했다. 그런데 그랬으면 또 철학 이론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의지가 자유롭다는 것을 전제하고서, 이 의지를 오로지 필연적으로 규정하는 데 쓰이는 법칙을 발견하는 일이 바로 과제이다. 실천 법칙의 질료, 다시 말해 준칙의 객관은 결단코 경험적으로밖에는 주어질 수 없고, 그러나 자유의지는 경험적인 조건들에 대해 독립적으로 규정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므로, 자유 의지는 법칙의 질료에 대해 독립적이면서도 법칙 안에서 규정 근거를 발견해야만 한다. 그런데 법칙의 질료를 제외하면 법칙 안에는 법칙 수립적 형식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함유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법칙 수립적 형식은, 그것이 준칙 안에 함유되어 있는 한에서, 의지와 규정 근거를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위의 글은 이해하기 어려워 보인다. 암만 어려운 글도 사람이 쓴 것이다. 하나하나 씹으면 다 이해할 수 있다. 겁 먹지 말라. 열 번 씹어 이해되지 않으면 스무 번 씹어 이해하기 바란다. 함께 씹어보자.

- "실천 법칙의 질료", 법칙이 가동되려면 재료가 있어야 한다. 구체적 행동들을 뜻한다.
- "준칙의 객관"은 준칙이 발현되는 대상이다.
- "준칙의 객관은 결단코 경험적으로 밖에는 주어질 수 없"다. 의지 가동을 규제하는 법칙이 있다고 쳐도 이를 위해서는 구체적 행동들이 있어야 한다. 이들은 구체적 경험 속에 있어야 한다.
- "자유의지는 법칙의 질료에 대해 독립적이면서도 법칙 안에서 규정 근거를 발견해야만 한다". 아파도 학교 오고, 뚜드려 맞아도 자기 할 일은 한다. 자유의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자살'도 있다. 자유의지는 법칙의 질료에 대해 독립적이면서 그 규정 근거는 법칙 안에서 발견 되어야 한다. 어느 사실 과학자도 이를 발견하려고 하지 않는다. 철학자만이 찾으려 한다.
- "법칙의 질료" 즉 구체적 행동 대상을 제외하면 "법칙 안에는 법칙 수립적 형식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함유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보통 사람들은 자연 속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법칙 수립적 형식", 이 보편적 형식이 있고, 그 형식이 다양한 내용을 담아야 이 세계가 질서를 갖출 수 있다.
형식 그 자체가 그 의지 활동을 규정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그러면 그 형식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이 실천 이성이다. 우리의 이성, 양심이다.

나에게 실천 이성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보편적 형식이다. 구체적 내용이 아니다. 이럴때 어떻게 행동한다는 구체적 처방전이 아니다. 처방을 내리는 원리이다. 그래서 그 원리는 일테면 함수로 주어진다. ax2+bx+c=y. 내가 실천이성을 원리로서 지니고 있으면 이런 경우에는 이런 행동을, 저런 경우에는 저런 행동을 원리를 지키면서 한다. 이때 내 행위는 보편 타당한 도덕성을 가질 수 있다. 그러면 그 원리가 뭐냐? 끝내 칸트가 말한 것은 '네 이성에 따라 행위하라'는 것이다. 내 이성과 네 이성이 다르다면? 칸트는 '잘 생각해봐, 진짜 이성적인 것이 뭔지', '가슴에 손을 얹고, 마음을 비워서 생각하면 다 똑같아 지느니라. 그렇게 얘기 안하는 자들은 다 그짓말 쟁이들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순수 이성은 실천적일 수 있다. 다시 말해 독자적으로, 곧 일체의 경험적인 것으로부터 독립해서 의지를 규정할 수 있다." - [[실천이성비판]] O72 V42, 순수실천이성 원칙들의 연역-

"순수 이성은 실천적일 수 있다". 우리 행위를 주도하는 실천 이성 중에도 순수한 것이 있고 오염된 것이 있다. 오염된 실천 이성? 일테면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 마음이 다른 것이다. 칸트가 말하는 실천이성은 대개 순수한 실천이성을 가리키고, 순수이성은 대개 순수한 이론이성을 가리킨다. 두 가지 이성이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이성이 두 가지 영역을 관장하는 것이다. 하나는 세계를 오염되지 않게 아는 영역이고, 다른 하나는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원리에 따라 인간답게 행동하게 하는 영역이다.

일상 생활에서는 순수한 이론 이성도 순수한 실천 이성도 걸리적 거릴 때가 많다. 나도 오염시키고 남도 오염시키며 살면 편하다. 그렇다고 편하기만 하지는 않다. 찝찝하다. 그리고 그렇게만 살면 망한다. 짐승으로 타락한다. 우리의 순수 이성은 늘 경험에 의하여 오염된다. 그렇지만 오염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가 바짝 긴장하면 된다. 그래서 독립적이어야 한다. 인간의 인간다움은 자신을 오염으로부터 지켜내는 데에 있다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다.

경험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다고 칸트가 주장하는 실천이성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인가? 알고보면 학교에서 배운 것 아닌가? 비유를 들어 보자. '5+7=12'임을 우리는 배워야 안다. 배우기 전에는 잘 모른다. 그 지식이 생기는 과정은 경험 속에서 일어난다. 학습이라는 경험을 통하여 수학적 진리를 알게 된다. 그런데 '5+7=12'가 타당하다는 근거는 학습 과정 속에 있지 않다. 마찬가지이다. 내가 옆에 있는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도덕 교육을 받아야 알 수 있다. 그러나 인격적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것이 타당하다는 근거가 도덕 교육 과정 속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칸트의 입장이다.


예지세계는 예지적 대상으로 지성에 의해서만 표상할 수 있는 세계이다. 예지세계를 알려면 감각을 매개로 하지 않는 직관 능력이 필요하다. 인간은 예지세계에 대해서 '예지세계가 있구나'정도를 알 수 있다.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그 세계에 우리가 걸쳐 있음 정도를 알 수 있다.


"Der bestirnte Himmel uber mir, und das moralische Gesetz in mir.
내가 자주 그리고 계속해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의 마음을 더욱 새롭고 더욱 커다란 놀라움과 경외감으로 충만시켜 주는 것이 두 가지 있다. 내 머리 위의 별이 총총한 하늘과 내 마음속의 도덕 법칙이 그것이다." - [[실천이성비판]], 맺음말, V162 O289 -

"내 머리 위의 별이 총총한 하늘"은 자연법칙에 의해 일사분란하게 지배되는 자연의 세계를 뜻한다. "내 마음속의 도덕법칙"은 내 인격적인 또 하나의 세계를 여는 구심점이다. 자연에도 법칙이 있고 내 인격에도 법칙이 있다. 칸트는 이것을 생각할 수록 가슴이 뛴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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