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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기철 ( http://dieBildung.net ) Date : 2008/12/01  Hit : 8030  Recommend : 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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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객체화된정신] 5주차 - 49~50절
2008.10.10. (金)

강의: 손동현
발표: 박주영, 신원규
필사: 신기철

*


49절 객체화된 정신의 존재방식에 대한 결론 - 박주영 발표

a. 예술의 안과 밖에 있어서의 모든 객체화의 일치(평행성)

  모든 종류의 예술작품 속에 정신적 내용이 객체화되어 있어, 이것이 그 예술작품에서 하나의 살아있는 정신에게 다시 말을 걸어 올수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이렇게 말하여지는 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주제적으로 명명되어 지는 것만이 내용인 것이 아니라, 그것을 파악하는 관조방식과 전체상도 내용이고, 나아가서는 그 속에 그 전체상이 삽입되고 그것을 통해 드러나는 세계관도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예술작품과 기타종류의 객체화에 있어서 근본현상의 철저한 일치성(평행성)과 대조한다면, 일반적 형식에 있어서 다음의 세 가지 요점으로 요약된다. 일치성(평행성)과 함께 차이성이 간과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여기서 우선은 근본특징만을 다룬다.


*

객체화된 정신에 대해 중간 결산해보자는 절이다.

일치(평행)성 - 회화, 음악, 어디에서든 공통된 구조가 있다는 뜻이다. '공통성'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똑같냐, 그렇지는 않다. 변양이 있다. 기본 구조는 공통적이다.

지난주에도 보았듯이 조각, 음악, 건축, 연극, 특히 시문학은 각각 다른 영역이다.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영역들 간에 공통성도 나타난다.

ersehen꿰뚫어 보면 안에 있는 것이 나에게 나타난다erscheinen. - '말을 건다', '응답을 해 온다'로서 여러 차례 이야기한 것이다.


*

b. 실질형성체에 의하여 변천에서 벗어나 있음

  살아있는 정신의 생명은 본질적으로 그것이 변천하는 데 있다. 객체화된 정신은, 이 변화에 얽매여짐으로써, 그것을 산출한 그 정신의 생존기간을 넘어서 보존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보존이야말로 객체화된 정신을 살아있는 정신으로부터 구별하는 특성적인 근본현상이다. 이 비정신적인 어떤 것으로서 실질형성체는, 객체화된 정신을 살아있는 정신의 변천에서 벗어나게 하는 바로 그것이다.
  객체화된 정신은 결코 시간과 역사를 벗어난 것이 아니며, 객체화된 정신의 보존은 실질형성체에 매여 있다. 다만 이것은, 객체화된 정신 속에 자기를 객체화한 살아있는 정신의 역사와는 다른 역사일 뿐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보존되고 역사적으로 그 창작자를, 그의 민족과 그의 시대를 넘어서 존속하곤 할 수도 있다.


*

살아있는 정신은 그것이 개인적 정신이든, 수명이 더 긴 공동정신 혹은 객관적 정신이든 객체화되면 기존의 정신으로부터 벗어나 물질에 갇혀 반 죽은 상태로 반 영구적으로 존속한다. 즉 살아있는 정신과는 별도로 자기 자신의 역사를 갖는다. 이후 살아있는 정신이 그 객체화된 정신을 되살리면 반 죽은 상태이던 객체화된 정신은 다시 살아난다. 마찬가지로 객체화된 정신은 죽을 수 있다. 이후에 되살릴 사람이 없으면 반 죽은 상태에서 아주 죽는다. 반면 되살릴 사람은 있는데 그 정신을 새겨 놓은 물질이 사라지는 경우가 있다. 마찬가지로 객체화된 정신은 죽는다.

"실질형성체" - real Gebilde - 책, 조각작품. '거기에 담김으로써 변천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

c. 이층성의 존재적 의미
  둘째로는 이층성이다. 객체화는 바로 정신적 내용이 살아있는 정신에서 분리되고 그 밖으로 내세워지는 데에 성립한다. 그러나 정신적 산물이 부담된 것으로서 그 위에 [발 붙일 수]있는 어떤 다른 실질적 토대도 얻지 못한다면 분리는 곧 멸절을 의미한다. 이와 반대로 정신적 산물은 멸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로 실질적 정신의 멸절에서 해방된다는 것을 현상이 보여준다. 정신적 내용은 어떤 다른 실질적 부담자에 부착하지 않고서는 분명코 산 정신에서 분리될 수 없다. 물적․감각적 존재가 살아있는 정신을 부담하는 존재 및 살아있는 정신의 생명적 존재토대(그 정신을 간직한 한 민족의 생명적 생존)와 교대하게 된다. 물적인 것 위에, 그 속에 객체화되어 있는 정신적 존재가 직접 발붙이고 있다.
  이층성과 이것에 있어서의 존재방식의 이질성이 지닌 존재적 의미는, 그 이층성이 정신의 부담되어 있음의 특유한 방법을 결정한다는 점인데, 즉 이러한 방식에 있어서만이 살아있는 정신에서 분리되고 그것 밖으로 내세워진 정신이 역사적 존재, 자립성 및 존속을 얻게 되는 것이다.

[발제자 주]
1.살아 있는 정신이 예술작품의 전경을 통해 배경을 읽어냄으로 정신적 내용인 이어지는 것
2.객체화된 정신이 물적인 토대에 발붙이고 있음으로 살아있는 정신으로부터 분리되는 것
⇒ 이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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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과 배경 여러 차례 이야기 하였다. 전경은 물질적 존재층, 배경은 정신적 존재층, 양자가 이어져 있어서 이층적이다. 이것이 강점도 되고 약점도 된다. 변화에서 벗어나 존재할 수 있으나, 존재적으로 충실하지 못하고 뭔가 결손되어 있다. 칠푼이다.

1문단
"물적 ∙ 감각적 존재가 살아있는 정신을 부담하는 존재..." - 물적, 감각적 존재는 돌멩이나 종이와 같은 것이다. 이것들이 정신을 부담하는 존재 및 살아있는 정신의 생명적 존재토대와 교대한다. 손동현의 정신을 부담하는, 지고가는 존재가 뭔가? 몸뚱이다. 정신적 활동은 두뇌를 토대로 한다. 두뇌 속의 신경, 생리적 활동 자체가 정신 활동이라고 말은 못할 망정(심신 동일체론은 인정하지 못하더라도), 뇌수에서의 생명 작용 없이 뇌 정신 활동이 있겠는가? 있다고 한다면 귀신이 있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영혼이 영원히 산다' - 기독교, 플라톤의 입장이다.

살아있는 정신은 손동현의 몸이 떠받치고 있다. 손동현의 몸이 죽으면 손동현의 정신은 끝난다. 그런데 손동현이 책을 썼다. 그러면 책에서는 종이, 잉크가 손동현의 몸뚱아리를 대신한다. 이를 하르트만은 '교대한다'고 표현한다. 문자가 없는 시대, 기록이 없는 문화가 있었다. 그때에는 입에서 입으로 전했다. '손동현-아들-아들...' 외에는 정신이 지속되는 방법이 없었다. 직접적이라 좋긴 하지만 왜곡의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책으로 남기면 손동현이 다시 와도 못 고친다. objektiv하다. 그래야 공동체가 형성되고 역사가 형성될 수 있다. 그래서 문자와 기록이 중요하다.

문자, 기록이 없는 문화권에서도 객체화 작용은 있었다. 그림, 건물, 돌 무덤 등. 객체화되긴 했지만 나중에 그것을 다시 되살리는 사람들이 원래 객체화되었던 그 정신을 그대로 살리지 못하고, 왜곡하고 부정하였다. 정신의 내용 전수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객관성이 약해져 그 공동체가 지속되기 힘들었다.

스페인 중대 2개 정도의 군인이 가서 아스텍 문명을 절멸시켰다. 문자가 없어 공동체 문명의 힘이 약했다. 문자 없는 문화의 힘은 취약하다. 금방 없어지기 쉽다. 물론 문자가 다 하지 못하는 객체화된 정신의 전수를 문자 외의 유산들이 한다. 그런데 왜 문자가 왜 그렇게 강력한 힘을 발휘할까? 시문학과 다른 회화가 결정적으로 다르다고 하였다. 문자의 기록에서는 매체가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똥종이에 썼건 새 종이에 썼건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정신적 내용이 거의 직접적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다른 회화나 건축물에서는 매체가 거의 결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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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제 3의 요인. 관계의 삼항성

  감각적으로 접근되는 실질형성체는 다시 제 3자가 존재할 경우에만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객체화된 정신의 존재는 어느 때나 이 제 3요인에 의지하고 있고, 이것 없이는 그 존재가 성립하지 않는다.
  예술작품에 있어서 지적되었던 것, 즉 예술작품은 언제나 특수하게 바라보는 관조자에 대하여만 존재하며, 이것은 보편적으로 모든 객체화된 정신에 대하여도 타당하다. 그러므로 객체화된 정신의 복합적인 존재방식을 이루는 전 관계는 삼항적 관계이다.
  객체화된 정신이 살아있는 정신에게 의지하고 있다고 해서 정신의 삶 전체에 있어서의 객체화된 정신의 존재의의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살아있는 정신도 객체화된 정신의 의지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독특한 상호제약성이 존재하고, 이것이 역사적 정신의 삶에 똑같이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

[발제자 주]
물적․실질적 부담자 +그 속에 고정된 정신적 산물 +살아있는 정신(제 3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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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체화된 형성물은 이층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층구조를 결속시키는 것이 밖에 또 있어야 한다. 그래서 3항이다. 3항은 개인정신일 수도 있고 공동정신일 수도 있다. 하나인 정신의 다른 양태이니까. 3항 즉 이해하는 자, 바라보는 자가 있어야 이층이 이층구조물로서 등장하고 이층이 결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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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그 속에 들어 있음]의 수수께끼와 직접적으로 [발붙이고 있음]의 외관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떻게 해서 정신 그 자체 직접 형태지어진 질료에 발붙이고 있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 이 정신이 살아있는 정신에 [대하여] 이해하는 재인식에 있어서 질료에 발붙이고 있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객체화에 있어서의 물적인 질료와 정신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존재적 단계접속의 불가사의한 배제 또는 뛰어넘음은 단지 외견상의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통찰해야 한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정신은 언제나 그 낮은 존재층들에 의하여 부담되어 있고, 더욱이 살아있는 정신의 모든 기능에 있어서 부담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파악하는 재인식의 기능에서도 쉽게 제시될 수 있다. 1) 다만 우리는 그것은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여, 이러한 기능들에 주의하지 않거나,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객체화된 정신의 존재방식과 살아있는 정신의 존재방식간의 차이가 이제야 명료해진다. 즉 살아있는 정신에 있어서는 존재적 중간단계가 그의 실질적 현존의 직접적 토대이고, 이와는 반대로 객체화된 정신에 있어서는 중간단계가 관찰의 방식 속에 포함되고 그렇기 때문에 말하자면 관찰 그 자체 속으로 소멸해 버린다. 그러므로 중간단계는 이 관찰 자체 내에서 대상적으로 되지 않고 객제화한 정신에 있어서 함께 나타나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마치 현상하는 정신이 형태지어진 질료에 직접 발붙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발제자 주]
1) 읽기, 듣기, 보기는 정신적 기능이기도 하고 신체적․심적 기능이기도 하다. 그러나 음파와 광파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이것은 물리적 기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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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은 어떻게 물질 속에 들어가 있는가? 알고 보면 세계 자체가, 특히 인간이 수수께끼이다. 나는 기독교의 원죄가 수수께끼라고 이해한다. 그 죄는 도덕적 죄가 아니라 존재론적 죄이다. 육신과 영혼이 한 곳에 붙어 있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그게 원죄다. 그 모순적 관계에서 온갖 갈등과 비극이 싹튼다. 모든 불행의 근원은 그 두 존재층, 서로 같이 있을 수 없는 전혀 다른 즉 이질적 존재층이 결합해서 하나의 존재자 속에 있다는 것에 있다. 정신이 물질에 담겨 있는 것이 수수께끼요 불행이긴 하지만, 정신은 그것에 의거해서만 자기 활동하고 자기를 드러낸다.

인간이야말로 복합 수수께끼다. 4개의 존재층이 하나의 존재에 복합되어 있다. 이 세계에서 제일 정직한 놈들은 물질이다. 비극도 없다. 물리학이 오류 가능성이 낮다. 그런데 알고 보면 세계 전체가 수수께끼다. 물리법칙이 그렇게 작용한다는 것도 수수께끼이기 때문이다.

'발 붙이고 있음' - 의거依據(그것에 의지해서, 그것에 근거해서 발 붙이고 서 있다).

[3문단]
전경을 뚫고 배경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객체화된 정신에서 결손된 S(심성), L(생명)을 채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하자면 관찰 그 자체 속으로 소멸해 버린다(해소된다는 뜻이다)" - 그 속에 있다는 뜻이다. 관조하는 자가 없으면 객체화된 정신의 중간단계가 채워지지 않는다.

우리는 객체화된 정신의 G(정신)를 만나려고 하지 S(심성), L(생명)과 같은 중간 것은 지나가버린다. 그래서 중간 단계는 "객체화된 정신에 있어서 함께 나타나지 않는다"

"형태지어진 질료" - 실질 형성체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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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분리의 이율배반과 내어맡겨져 있음

  객체화된 정신은 물론 그것을 가지의 성과로서 산출하고 물적 실질형성체의 형태 속에다 각인한 살아있는 정신에서 분리되어 존재하지만, 그러나 살아있는 정신 일반에서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객체화된 정신은 원래 창조하는 정신에, 그 다음에는 재발견하는 정신에 매여 있다. 전자에게는 객체화된 정신의 발생이 매여 있고, 후자에게는 그 존속 또는 되살아남이 매여 있다.
  객체화된 정신은 그의 운명을 자신 속에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밖에, 그때 마다 살아 있는 정신 속에 갖고 있다. 객체화된 정신은 오해와 왜곡될 수 있고, 망각과 오인, 파괴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정신만이 활동적이고 창조적이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정신 미망과 미신으로 돌이킬 수 없이 귀중한 것을 파괴할 수 있다. 그러나 또 발견한 것을 소중히 보존하고 존중할 수도 있다. 살아있는 정신인 자기가 파악하지 못하는 것에 의하여 처음부터 붙들려 있다. 그리고 이 붙들려 있음에서 보존하고 이해하려는 경향이 생기고, 이 경향은 진행하는 가운데 실제의 재발견과 재인식으로 되는 것이다.


*

객체화된 정신은 살아있는 정신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체성을 가지지만, 자신을 봐주는 사람에 의존해야만 깨어날 수 있다. 이것이 객체화된 정신의 이율배반이요,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역사가 전개된다. 역사철학에서 역사의 실재성과 역사의 이념성을 주장하는 두 노선이 있다. '역사는 늘 다시 쓰여진다', 객체화된 정신을 다시 살려내는 자들은 후대이니까. 후대에 의하여 전대의 활동이 늘 재해석된다. 역사는 일어난 사건들로서 고정불변의 실체적인 것이라는 주장과 함께 역사는 늘 다시 쓰여질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늘 맞선다. 전자는 실증주의사관으로서 사실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후자는 이념주의 사관으로서 사관의 주장을 강조한다.

확실한 존재와 확실하지 않은 존재를 잘 구별해야 한다. 달리 발견한 것들 중에 공통된 것은 있을 수 있다. 그 공통된 것은 비교적 존재적으로 확실하고 안정된 것일 수 있다. 그런데 공통된 것이 없으면 존재적 사실로서 중량을 잃을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사실을 보는 사람들의 눈이 얼마만큼 공정하냐가 문제된다.

현실의 시간적, 공간적으로 매여 있는 이해관계. 우리는 가치판단을 하는데, 그 관점은 현실일 수밖에 없다. 시공적 범위를 넓게 잡았을 때의 현실과, 좁게 잡았을 때의 현실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오늘의 나의 신체적 안락을 현실로 보면 그러한 입장에서 보는 판단은 공정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인류 전체의 안목에서 보면 훨씬 공정한 것이 나올 수 있다. 객체화된 정신을 살려내는 주관이 어떠한 주관이냐가 문제가 된다. 우리의 역사를 보는 데에 있어, 최근세사를 보는 데에 있어 장구한 민족의 관점에서 보느냐, 빨치산에서 보느냐, 우리 아버지 헌병감 시절을 염두에 두고 보느냐 등등,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의 차이이다.

그러면 전부 임의적, 주관적인 것이 되어 객관적 기준이 없게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 것을 역사에서 볼 수 있다. 널리, 멀리보는 안목이 승리한다. 그것이 진리가를 더 인정 받는다. 우리의 삶이 늘 다양하기 때문에 빨치산의 입장은 보편화되지 않는다. 헌병감의 입장이 보편화되지 않는다. 결국은 어느 사람에게 공통되는 것만이 진리를 떠받쳐 준다. 특히 역사과학에서는 그것이 더 합당하다.

살아있는 정신의 가치감, 가치를 파악하는 능력 - 그것을 통해서 살아있는 정신이 가치를 인식하면 그 가치가 현실 속에서 실현된다. 공통된 것을 잘 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거기서 더 나아가 앞으로 이 문화사회공동체를 어떻게 이끌 것인지 지침도 주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이미 공통된 것을 어떻게 추리느냐에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할 방향도 담겨 있어야 옳다. 앞으로 어떻게 갈지가 사관으로서 작용해서 그 기준에서 공동의사실을 추려내야 한다.

공동의 공통된 역사적 사실을 정리함에 이미 우리의 지향과 미래 기획이 들어가고, 거기에는 가치가 이미 개재한다. 어떻게? 그 역사가들의 가치감, 가치안, 가치관이 파악한 가치이다. 그 가치가 민족의 생존에 국한되는 것일 수도 있고, 보편적 진리의 고수일 수도 있다. 그 가치는 보편적이고 높은 것일수록 더 실현 당위성이 더 높은 가치이다. 그것이 어떻게 거기에 작용하느냐가 관건이 된다.

일본학자들 중에서도 한글이 일본 고대 문자의 모방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어떤 일본학자는 그것은 날조된 것이라고도 주장한다. 학자들 간의 가치안이 다른 것이다.

낙관적 견해 - 인류의 역사를 길게 보면 결국 진리가 승리하고, 높은 가치가 실현되는 쪽으로 진행된다.

반대 견해도 있다. 역사는 가치 실현이 점점 더 많이 되는 쪽으로 발전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좌충우돌 제자리 걸음이라고 보는 입장도 있다. 항상 진리가 이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너는 어떻게 보느냐? 니체 말도 옳고, 헤겔 말도 옳다. 뭘 선택해야 하는가? 답답한 거다. 이에 의사결정을 위하여 다수결이 고안된다. 그런데 이것이 그리 좋은 것이 아니다. 그런데 바쁜데 어떻게 해? 다수결로 할 수밖에. 혹은 독재자가 피흘리며 하기도 하고. 서양의 역사는 다수결이 피를 덜 흘리는 방법이라고 가르쳐준다. 사실 다수결이라는 형식을 담아서 누군가가 한다.

가치 실현과 관련하여 평소 내 생각 두 가지를 말하겠다.

1) 가치안이 있어야 한다. 썩은 사과 먹을래, 성한 사과 먹을래? 썩은 사과 집는 놈도 있다. 가치안이 잘못되어 나쁜 것이 나쁜 것인지 모르고 선택한다. 가치안을 드높이는 ‘교육’이 필요하다.

2) 공동체 구성원들이 비슷한 현실적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야 의견도 비슷해지고, 가치안도 비슷해진다.

이 두가지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늘 그러한 문제의식을 갖는 지도자를 만나는 행운이 있어야 한다.

‘국민개개인의 가치안을 드높이는 것’, 이것이 교육이 할 일이다. 그 점을 노심초사한 이가 있었는지.


*

Ⅱ장 객체화된 정신의 역사적 존재

50절 객체화 속에 있는 [요청]

객체화된 정신의 三項的 관계
    실질형성체 -요청(요구,자극,호소)----]살아있는 정신
요청이란?
-정신적 산물로부터 나와서 살아있는 정신에게로 향하는 원동력, 힘, 영향을 말한다.
-살아있는 정신을 계속 자극, 추궁, 강제하여 실질형성체를 철저히 규명하도록 한다.
-실질형성체를 넘어서 살아있는 정신의 변천에 좌우되지 않고, 실질형성체와 함께 보존된다.
-실질적인 것이 아니라 현상하는 것에 불과하다.


*

우리는 문화적 유산을 먹고서 정신적 존재로 성장한다. 그런데 그 문화적 유산이 나에게 말을 건다. 그것이 요청이다. 일테면 '니가 아무리 빠다를 퍼먹어도 너는 조선놈이니 조선의 얼을 지켜라'.

역사 - 반 죽어있는 객체화된 정신과 살아있는 정신간의 관계. 객체화된 정신은 후대인에게 요청한다. 그리고 후대인은 객체화된 정신에게 나름의 태도를 취한다.

객체화된 정신과 살아있는 정신 - 후대인과 선대의 유산으로 생각하면 된다.


*

a. 보존과 시간적 불연속

        객체화된 정신의 현상은 이러한 규정들로 그 근본특징이 기술되었다. 이 경우 그 현상은 한 편으로 객관적 정신에 대한 그의 깊은 차이성과 그의 전혀 다른 존재방식에서 효력을 갖게 되었고, 다른 편으로는 객관적 정신과의 연관에서도 파악되었다. 객체화된 정신은 첫째로 객체화된 정신을 자기의 산물로 획득하고 만들어내는 그러한 살아있는 정신을 전제하고, 둘째로 감각적 실질형성체에 매여 있어 살아있는 정신에서 분리되며, 셋째로 그러나 그런 분리됨에서도 살아있는 정신에 [대하여] 객체화된 정신이 존재하게 되는 바의 그 살아있는 정신에 계속 의지하고 있다는 이 세 가지 점을 우리가 고수한다면, 이로써 객체화된 정신의 현상은 우리가 앞에서 던진 물음, 즉 “객체화된 정신에서 시간적으로 보존되는 것이 본래 무엇이냐?”를 다시 제출할 수 있을 만큼 넓게 해명된 것으로 인정될 수 있다.
        그러나 망각의 시대에는 정신적 산물의 본래 존재를 전혀 언급할 수 없으므로 위의 물음을 묻기가 어렵다. 도서관 내의 필사본 속에 잠자고 있는 시작품이나, 파편 속에 묻혀 있는 조각 작품은 [그런 모양으로는] 누구에 대해서도 존재하지 않고, 누구인가(관조자)에 [대한] 존재가 아닌 다른 존재는 결코 갖고 있지 않으므로, 이런 방식(자고 있고, 묻혀 있는 방식)으로는 도대체 아무런 존재도 가지지 않는다. 즉 物的인 實質者(양피지, 문서, 돌)만이 먼지투성이가 되거나 파묻혀 있을 수 있고, 관조자에 대하여 물적 실질자 속에 현상하는 것(시의 인물)은 아무런 실질성도 가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현상하는 것이 물적 실질자와 연관되어 있고, 물적 실질자와 의존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여기에 아직 해명되지 않는 문제점이 있다. 문헌 속에 문자밖에 보존되는 것이 없다고 한다면 연속적인 보존이지만 단지 사물의 보존이지 정신의 보존은 아닐 것이고, 시의 인물들이 보존된다고 한다면 정신의 보전이긴 하지만, 특정한 때에만 존재하고 다른 때에는 존재하지 않는 불연속의 보존이기에, 정신적 산물이 살아있는 정신의 변천에 [내어맡겨져 있음]은 정당하게 평가되겠지만, 정신적 산물로부터 발하는 그 원동력, 정신적 산물이 인식이 안 되고 이해가 안 된 채 잠자고 있을 때에도 보존되는 그 원동력은 정당하게 평가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산물이, 그것을 알아보는 입장을 발견하는 살아있는 정신에 대해서만 존재한다는 것과 산물은 무슨 까닭에 재삼재사 그러한 입장이 발견되는가에 대한 이유를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문학과 예술에는 시대의 변천에서 여러 번 되살아나는 작품들이 있느니 말이다. 이럴 때 그 작품들은 매번 그 정신적 내용을 가지고 다시 살아있는 정신 속으로 밀고 들어와, 살아있는 정신의 정신적 산물로 되고, 살아있는 정신 속에서 계속 작용하며, 제 쪽에서 살아있는 정신을 형성하고 움직인다.


*

"불연속" - '단속'으로 이해하면 어떨까?

창조/창작하는 정신, [그 결과 그 정신으로부터 분리된] 객체화된 정신, [그 객체화된 정신을] 이해하는 정신, 이 세 가지가 역사가 성립하기 위한 기본 요건이다. 의사소통이 가능하기 위한 세 가지 조건이기도 할 것이다. 이 의사소통을 시간적으로 늘리면 역사다. 그리고 역사에서는 의사소통 참여자가 개개인이 아니라 집단이다. 그러니 개인이 최전방에 서게 되지만 역사에서는 공동 정신이 전면에 등장한다.

정신이 '보존'되려면 정신에서 정신으로 그 내용이 직접 전수되는 수가 있다.

연속 / 계속 / 단속(끊어졌다가 이어짐, 다시 살아남) - 역사에서는 단속이 제일 중요하다. 직접 전수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

b. 시대의 선별. 이법적 존재에의 잘못된 동화

        작품들은 파묻혀 있고 잊혀 있을 땐 그렇지 않겠지만, 단지 이해되지 못하고 있을 때는 어디서나 아마 지속적으로 힘과 같은 어떤 것이 나와 살아있는 정신을 계속 추궁하며, 살아있는 정신이 그 내용을 예감하는 바의 [작품]과 씨름하게끔 자꾸 되풀이하여 살아있는 정신을 강제한다. 따라서 역사적 시기는 그 작품에게 있어서는, 그것을 이해하는 시대와 이해하지 못하는 시대로 나뉜다. 이러한 이해에서 변하는 것은 살아있는 정신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보존의 아포리아를 더욱 어렵게 한다. 만약 우리가 이해되지 아니한 객체화된 것에서 지속적으로 일종의 [힘]이 나온다는 사상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정신적 내용에게 일종의 [이법적 존재]와 같은 어떤 자립적 존재까지도 귀속시켜야 하도록 내몰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의 역사에 있어선 이러한 [이법적 존재]가 흔히 이념적인 것, 보편적인 것, 본질(essentia)에게 수여되었기에, 정신적 존재의 이러한 형이상학을 통해 우리는 현상성분으로부터 현저히 멀어지게 된다. 이러한 형이상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점들이 표준적이다.
        1. 이법적 존재는 절대적인 초시간성과 초역사성을 가져야 하고, 그의 보존은 완전한 보존일 것이며, 순수하고도 무시간적인 동일성일 것이다. 그러나 정신적 산물은 발생하고 소멸하는 그 무엇이며, 다만 (살아있는 정신과의) 상대적인 의미에서만 보존될 뿐이다.
        2. 이법적 존재는, 전혀 어떤 실질적인 것에 매이지 않고 순전히 그 자신만으로 따로 존재하며, 실질적인 것에 따르지 않고 -아니, 실질적인 것에 어느 정도 대립하여 -순전히 자기 자신에 있어서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인데, 이 점은 순수한 본질성, 수학적 법칙성, 가치계의 근본형 등에 대하여 타당하다. 따라서 시의 인물, 과학이나 철학의 세계상, 신화적 표상 등이 이법계에 속한다면, 그것들은 그것들의 역사적 보존을 위하여 행태 지어진 실질형성체(문헌, 돌 등의)를 도대체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들은 어느 때나 자율적이고, 어떤 지나간 정신의 작품에 의한 引導 없이도 그 자체에서 관조될 수 있는 것일 것이다. 그것들은 순수한 자발적인 관조에서, 그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모든 정신에 대하여 되살아나야 할 것이므로, 정신적 산물에는 결코 적중하지 않는다. 정신적 산물은 창작된 산물이고 동일한 것으로서는 두 번 창작되지 않기 때문이다.
        3. 이법적 존재는 결코 단지 어떤 사람에 [대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고, 결코 살아있는 정신의 보상행위에 의지하고 있지 않다. 여기에 그 초시간성에 대한 근거가 있고 또한 어떤 종류이건 간에 실질형성체에 대한 그 비의존성의 근거도 있다. 자체존재자에 대해서는, 부담되어 있음과는 전혀 무관하게 그것이 존립하고, 따라서 그 자신이 대상으로 됨과도 무관하게 존립한다는 것이 특징적이지만, 정신적 산물은 어떤 살아있는 정신에 대하여 대상으로 있음 이외의 다른 존재(있음)를 가지지 않고, 그 대항요인으로서의 살아있는 정신없이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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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적 힘을 갖고 우리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에 객체화된 정신을 이법적 존재로 잘못 동일시한다.

존재 그 자체(Ansichsein, Reality, 실재)는 우리에게 저항하는 힘을 가져야 한다. 그냥 쌩까고 지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힘이다. 존재에는 Ideal이법적인 것과 Real실질적인 것이 있다. 이법적 존재에는 사물의 본질/ 논리성 / 수 / 가치가 있다. 가치가 늘 문제다. 이것이 이법적 존재인지. 실질적 존재는 네 개의 존재층으로 이루어진다. 물질/생명/심성/정신. 그런데 정신은 세 양태로 나타난다. 개인적 정신/ 객관적 정신 / 객체화된 정신으로 나타난다.

객체화된 정신은 문화의 흥망성쇠로 인하여 time interval이 워낙 길어서 ideal한 것과 혼동하곤 한다. 다음의 세 가지 점에서 혼동해서는 안 된다. 1) ideal한 은 초시간적인데, 객체화된 정신은 시간에 제약된다. 2) ideal한 것은 Ansich한 것이지만 객체화된 정신은 Ansich+Fuer-uns이다. ideal한 것은 독자적인 것인데, 객체화된 정신은 독자적이지 못하다. 왕년에 철학자들이 양자를 구별 못하는 오류를 범했다.

정신적 활동의 산물과 이법적 존재를 구별하기 어려울 수 있다. '루트 백만은 천이다', 나는 아는데 초등학생은 모른다. 이러한 수학적 사실은 내가 생각해낸 것이지 그것 자체에 ideal한 것이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가치? 나는 여기에 있다고 보고 너는 저기에 있다고 본다. 보기 나름 아니냐. 논리? 생각하기 나름 아닌가? 사물의 본질? 그런 것은 있지도 않고. 하르트만의 ideal, real의 엄격한 구분은 억지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포퍼 - ideales Sein을 인정하지 않는다. 수학 법칙도 우리가 생각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세계를 딱 셋으로 나눈다 - 세계1, 2, 3. 1-물질적 세계, 2-인간의 정신적 활동 영역, 3-정신적 활동 결과 나온 영역 즉 문화의 세계. 여기에 ideal한 것이 들어갈 여지는 없다. 포퍼에게 Ansichsein은 물질적인 것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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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객체화가 살아있는 정신에게 [요구를 함]

        객체화된 정신은 그 존재방식에 따라 三項的 관계 속에 얽어매어져 있다. 그것은 한편으론 어디까지나 실질형성체에 매여 있다. 또한 그것은 양면으로 부담되어 있다. 즉 실질형성체만이 그 부담자인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정신도 함께 부담한다.(51절a) 이것이 객체화된 정신을 근본적으로 이법적 존재로부터 구별한다. 따라서 객체화된 정신 속에서 역사적으로 [보존되는]것이 본래 무엇이냐는 물음에, 우리는 그 속에 직접 보존되는 것이 다만 감각적 실질형성체이고 [함께 주어진] 정신이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지만, 이는 반만 적중된 대답이다. 왜냐하면 간접적으로는 더 이상의 것이, 하나의 다른 것이 보존된다는 바로 그것이 이 보존의 특유한 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다른 것을 다만 곧바로 정신적 산물 자체 속에서만 찾아서는 안 되고, 정신적 산물의 존재방식에서 보존되지 않는 요소를 이루는 살아있는 정신이란 反對項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다만, 객체화에 있어서 실질형성체를 넘어서, 살아있는 정신의 변천에 좌우되지 않고 실질형성체와 함께 보존되는 그 어떤 것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실질형성체 자체와도, 부담된 정신적 산물과도 일치하지 않고, 살아있는 정신의 이해와도 일치하지 않는 어떤 것만이 그러한 것일 수 있을 것이다.
        문서나 형태지어진 돌은 그 실질적 형태 자체의 방식대로 이미, 살아있는 정신이 그러한 것들을 알아보게 될 때는 언제나 살아있는 정신을 자극하여, 그 자신을 철저히 규명하도록 요구하는 그러한 어떤 것을 지니고 있다. 이리하여 객체화의 실질형성체에서 사실상 살아있는 정신에게로 향한 요구가, 즉 살아있는 정신에게 제출되고 또 살아있는 정신에 의하여 그러한 것으로서 느껴지기도 하는 요구가 나온다. 이 요구는 실질적인 것이 아니라 현상하는 요구에 불과하고, 형성체를 형성한 창작하는 정신에 의해서 사실적으로도 그러한 요구가 제출되고 있으며, 그뿐만 아니라 문자나 질료적 형성이 바로 창작하는 정신에 의해, 그러한 요구를 느낄 수 있게 하도록 그렇게 배려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정신의 여러 등급이 있지만, 그 모든 등급에 고유한 점은 그것들이 내용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앎을 선취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앎에서 그 내용을 파악하려고 하는 자극이 나오고, 그 속에 어떤 의미와 의의가 있다는 것을, 그가 읽을 수 있기 전에도 안다. 형태지어진 질료에서 자극이 나오는 형식은 다양하지만, 요구 그 자체는 언제나 그 속에 느껴진다. 그 요구 자체는 현상하는 요구에 불과하지만, 형태지어진 질료와 함께 그것은 보존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역사가 있는 한, 살아있는 정신이 언제나 거기에서, 창작된 인간의 작품과 접촉할 때마다 매번 똑같은 자극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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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신적 활동을 할 때 무엇에 끌려서 하는가? 우리의 정신적 활동이 그 결과로서 나온 객체화된 정신을 제일 먼저 빚어내고, 그것을 누군가가 이해하고. 그 객체화된 정신, 누군가가 빚어낸 것을 이해할 때 뭔가가 자꾸 요구를 한다. 창작하는 정신과 상관있다. 창작하는 놈이 의도한 것이다. 나는 정신적 활동할 때 뭔가가 나를 끌고 가고 나는 그 안에 담고, 나를 이끌었던 그 무엇은 내 정신적 활동을 하려는 사람을 다시 이끈다.

무엇이 나의 정신적 활동을 앞에 서서 끌고 가는가? ideal한 것(사물의 본질/ 논리성/ 수/ 가치)이다. 그것이 이해하는 정신에게 요청을 해온다. 그러면 객체화된 정신의 알멩이는 ideal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객체화된 정신 자체가 이법적 존재(초시간적, 독립적, 즉자적)는 아니다. 불완전한 존재인 객체화된 정신은 ideal한 것을 통하여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수학법칙과 같은 이법적인 것은 우리를 강하게 이끈다. [라라의 연애담]이 우리를 그다지 강하게 이끌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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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요청과 호소

        우리는 또 살아있는 정신 속에서만 객체화된 정신적 산물이 현상할 수 있는 그러한 관계에서 언제나 살아있는 정신이 실질형성체의 반대항을 이루기 때문에, 살아있는 정신의 모든 변천에서, 실질형성체가 보존되고 감각적으로 접근되는 한에서 현상함이 일반적으로 가능하도록 배려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살아있는 정신이 실질형성체에서 단지 요구만을 느낀다면, 살아있는 정신은 그 드러나지 않은 내용을 막연하게는 눈치 채지만 확실하게 손에 넣지는 못하고, 이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입장까지도 발견했을 때에야 비로소 살아있는 그 내용을 현상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요청(자극, 요구)이란 개념은 물론 비유에 불과하고, 어느 관점에서 보나 충분한 것이 아니다. 어느 누구인가에게 고의로 제출되는 그러한 요구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어떤 요청을 그의 작품과 결부시키는 그러한 창작하는 정신에 관련시킴도, 이 점에서 아무것도 변경시키는 바가 없다. 왜냐하면 바로 그 창조하는 정신은 이미 요구를 제출하기 위하여 거기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비유는 오히려 다만 살아있는 정신에 미치는 실질형성체의 영향만을 표현할 뿐이다. 살아있는 정신은 정녕코 이해되지 아니한 형성태조차 자기에게 제출된 요청으로서 느끼고, 그 자신이 그것을 이해하기 전에, 살아있는 정신은 자기가 작품에 의하여 붙들려지고 있음을 느낀다. 작품은 그를 놓아주지 않고, 그 속에 침투해 들어가도록 그를 자극하며, 이 강력한 자극은 발전한 탐구의 시기에 잊힌 죽은 언어와 문헌을 재구성하는 데까지 이끌어갈 수 있다.
        보통은 역사적으로 보다 가깝고 살아있는 전승 속에서 아직 접근될 수 있는 정신이 문제가 된다. 아직 이해될 수 있거나, 또는 학습할 수 있는 언어 속에도 살아남은 저작의 흔적이 있다. 조형예술은 말할 나위도 없이, 어느 때나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이해될 수 있는 하나의 언어를 이야기하곤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실질형성체가 우리에게 직접 호소해 온다고 말할 수 있으며, 주시와 해독, 몰두와 침잠에 盡力함으로써 그 호소를 만족시킨다. 이 [호소]도 우리에게 제출되고 우리에 의해 느껴지는 그 동일한 요구이다. 그런 한에서 여기서도 실질형성체에서 나오는 그 동일한 요청이 문제가 되고 있다.
        (앞 문제의 대답) 창작된 작품과 마주치는 모든 살아있는 정신에게 그 요청이 지속적으로 일어난다는 바로 이 점에, 보존에서의 저 [이상의 것]이 즉, 형태지어진 실질형성체와 함께 보존되는 저 다른 것이 존립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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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체화된 정신이 우리에게 말을 건다. 말을 걸려면 내가 말귀를 알아들어야 한다. 객체화된 정신은 우리에게 말을 걸면서도 우리에게 뭔가를 요구한다. 그 요구가 강한 것일수록 ideal한 것에 그 원천을 가지고 있다.

뭔가가 전수되어 과거가 흘러가지 않고 오늘에 다시 살고 미래가 오늘에 오려면 과거의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는 미래를 오늘로 앞당기는 힘에 있다. 일테면 문화유산을 물려받았는데 '이게 이렇다면 내가 이렇게 살아야지', '이러이러한 가치를 장차 실현해야지'하는 요구를 받는다. 그러면 미래가 앞당겨진다. 과거유산이 미래를 오늘로 앞당기게 하는 힘을 가질 때 역사가 성립하고 과거, 현재, 미래가 긴장관계 속에 있게 된다.

요구, 요청이 객체화된 정신으로부터 나올때 역사가 성립한다. 역사의 단절은 유산을 외면할 때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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