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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기철 ( http://dieBildung.net ) Date : 2008/12/09  Hit : 6865  Recommend : 672   
 [철학적인간학] 15주차 -上
2008.12.08. 월

강의: 손동현
발표: 이하림, 김선진
필사: 신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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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그송의 인간관을 파악하는 초점은 지속과 자유이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인가, 자연법칙에 지배되는 존재인가'의 문제를 베르그송은 지속의 관점에서 인간의 자유를 논함으로써 규명한다.

*

베르그송의 인간관 - 이하림 발표.

"공간적인 것과 시간적인 것을 혼돈하지 말고, 질적인 것과 양적인 것을 혼돈하지 말라"
공간적인 것 - 인간의 의식 외에 일어나는 현상들.
시간적인 것 - 흐르는 것, 인간 의식의 상태들.
질적인 것 - 양으로 대표될 수 없는 것. 살아가면서 느끼는 감정들.
양적인 것 - 의식 밖에서 일어나는 현상들. 펜 하나, 사과 두 개 등.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옮겨가는 것과 늘 동일한 상태를 고수한다는 것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는 것이다" - 의식에 적용하여 생각하면, 우리의 의식이 늘 동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계속 변화한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의식은 양화 불가능한 연속적 흐름이다. 이때 '연속적 흐름'은 시간과 연관된다. 우리의 의식은 매 시간 변화하면서 흐른다. 공간을 차지하는 것이 사물의 특징이다. 이에 사물은 서로 혼돈되고 겹쳐질 수 없다. 의식의 지속의 특징은 시간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이에 의식은 상호 침투적이다.

베르그송은 결정론, 비결정론 모두를 부정한다. 양자 모두 동일한 전제에서 출발하는데, 그 전제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둘은 모두 '시간의 가역성'을 전제한다. 베르그송은 시간이 비가역적이기 때문에 결정론, 비결정론의 주장은 모두 낭설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는 두 경향도 두 방향조차도 없고, 살아있는 자아만이 있는 바, 그 자아는 자유로운 행동이 지나치게 익은 과일처럼 떨어질때까지 망설임 자체의 효과에 의해 발전된다".

가역 - 거꾸로 돌이킬 수 있음reverse-ability.
비가역 - 거꾸로 돌이킬 수 없음.

김연아의 멋진 스케이팅은 끊임없는 반복에 의거한 것이다. 우리의 습관적 행동에는 가역적인 것이 많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은 가역적이지 않다. 김연아의 스케이팅이 같은 동작의 반복처럼 보이지만 실은 각각 다른 동작들이다. 한 번 넘어지고, 두 번째 넘어질 때 같은 자세로 넘어졌다고 해도 처음에 넘어진 것 그대로 다시 넘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 인생은 비가역적이다. reverse가 가능하지 않다. 한 번 뿐인 인생이기에 기쁨, 고통, 괴로움이 있다. 끊임없이 반복된다면, 다시 말해 가역적이면 지루함 밖에 없을 것이다.

가역적인 것은 공식에 집어넣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똑같은 조건에서 똑같은 실험을 하면 똑같은 결과가 나온다. 일테면 자연과학이 가역적 세계를 다룬다. 이때 똑같이 지켜지는 것을 법칙이라고 한다. 그러나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행동은 비가역적이다. 반복시킬 수 없고, 늘 새롭다. 공식에 넣을 수 없다, 다시 말해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항상 새로운 사태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행동이 늘 새로운 것이라면 지금 자체의 행동을 봐야지, 과거의 행동을 보고 이렇다저렇다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인간의 삶은 합리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는 행동의 연속이다. 이것이 자유이다. 자유는 자기가 자기를 결정하는 것이요, 그런 까닭에 자기 외적인 요인으로써 설명할 수 없다. 바퀴는 자기가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외적 요인의 작용이다. 외적요인에 의거하여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설명은 항상 타당하고 보편적이다. 그런데 인간의 행동은 그렇지 않다.

*

모든 시간은 동질적이지 않다는 의미는 아닐까? 인간의 삶, 의식 활동을 공식을 가지고 정량적으로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으니까 인간은 자유로운 것일까? 그 반대다. 인간은 자유롭기 때문에 양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과학이 더 발달하고, 미시세계에 관하여 더 정밀한 탐구가 가능해지면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자기동일성의 문제는? 의식은 계속 변화하는데, 자기동일성은 어떻게 확보될까?
변화의 모든 과정을 자기동일성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시간은 비동질적인가? 물리학자들이 따지는 시간은 동질적이다. 이를 공간화된 시간이라고 한다. 시간도 공간 속에 짐아 쳐 넣어 고정화시키면 동질적 시간이다. 그러나 체험시간, 순수한 의식이 활동하는 '지속'으로서의 시간은 비동질적이다. 이때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를 수 있다는 자아동일성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의식의 자기 정체성, 자기 동일성은 상위 실체성과 달리 substance가 아니라, 활동 자체의 자기 동일성에서 이루어진다. 활동하면서 늘 자기를 새롭게 형성해 나아간다는 것이다. 나의 자아동일성은 확고하게 있지 않다. 늘 위협받는다. 이를 포기하면 '걔 변했다'는 것이 된다. 의식적 활동을 수행하는 인격의 자아동일성은 끊임없이 지켜지고 형성되고 긴장 속에서 붙잡아 두어야 한다. 놔두면 침범 받아서 흩어진다. 긴장 속에서 겨우겨우 지탱되는 것이다.

공간적, 물질적 외부 세계와 만나는 의식도 있다. 이 의식은 기계적이다. 습관, 우리의 기계적 기억은 우리의 삶을 받쳐준다. 이 의식적 삶이 순수하지는 않다. 그러나 필요하다. 교목 은행나무를 보라. 은행나무 겉부분이 생명체는 아니다. 그러나 그 겉부분이 없으면 은행나무의 생명은 유지되지 못한다. 은행나무 생명 전체를 지탱한다. 마찬가지로 밥 먹을 때 조차 늘 새로운 의식이 작용할 수는 없다. 밥 먹을 때는 기계적으로 먹는 것이다. 이러한 일상적 자아도 있고, 물리적 세계와 만나지 않으며 순간순간 새로운 순수 자아도 있다. 인간 의식이 한 통이 아니라, 일상적 자아에서 순수 자아까지가 사선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기생적 자아 - 사회적 요구에 의해 굳어진 자아, 의식이 있는 자동기계. 자유로운 행동의 반복으로 생성.
근본적 자아 - 전 과거가 고유한 시간과 공간을 가진 채 기억되어 서로 침투하고 뒤엉켜서 형성. 자아의 가장 심층적 부분. 진정한 자유의 근원.

상승 - 근본적 자아를 향하여 끝없이 올라가려는 작용이다. 가치, 아름다움, 더 나은 것을 추구하는 상승 작용에 인간의 인간다움이 있다. 반대로 하강하여 물질화하는 경향도 있다.

인간은 전적으로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다. 물리적 세계와 만나는 부분은 전혀 자유롭지 않다. 물리적 세계에 복속된다. 순수 자아로 올라가야 자유롭다. 그래서 인간 자유의 문제는 늘 정도의 문제이다. 얼마나 자유롭게 살 것이냐의 문제이다. 정도에 따라 기생적 자아의 노예적 삶을 사는 이도 있고, 근본적 자아의 자유로운 삶을 사는 이도 있다.

현대 사회과학은 어떻게 하면 인간의 행동을 잘 파악하여 어떻게 operating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일테면 요즘의 경제학은 인간을 경제적 동물로 보아 어떻게 쥐어 짜면 이득을 얻을 것인지, 수단적 가치만을 따진다. 그래서 인류 문명에 망조가 들고 있다. 현대 사회과학은 인간을 가역적으로 보고,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내일을 기획하며 이에 인간을 통제하려고 한다. 이러한 틀을 갖추고 있지 않으면 사회과학으로서는 무가치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 사실이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자유로운 영역도 있고 자유롭지 않은 영역도 있다. 칸트에서처럼 두 영역이 각각의 세계로 나뉘지는 않는다. 전체가 모두 생의 약동이다. 층지워져 있는 것도 아니다. 연속되어 있으되 자유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때 자유는 정의될 수 없다. 정의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그 진행이 정지된 것이고, 완결된 것이며, 공간으로 충분히 표상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식을 가지면 다 자유로운 존재일까? 베르그송은 생이 창조적으로 진화, 도약한다고 주장한다. 어느 단계로 가면 뭔가 새로운 현상이 툭 튀어나온다. 침팬지도 의식이 있는데,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자유롭다. 다만 인간의 경우 희한하게도 그 정도의 차이가 매우 크다. 동물의 의식적 활동과 인간의 의식적 활동은 매우 다르다. 베르그송이 말하는 순수 의식은 인간에게만 있다고 보면 된다.

베르그송의 논의를 과학적, 본격적으로 전개하면 뇌수의 크기에 따른 영향도 논할 수 있다. 사회생물학, 진화생물학적 탐구와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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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물학 논쟁 - 유전자인가 문화인가 - 김선진 발표.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이다. 그런데 형이상학적 질문도 갖는다. 칸트는 아예 두 영역으로 나누었다. 베르그송에서는 영역이 나뉘지는 않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다. 생물학적 삶을 살기도 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기도 한다. 물리적 세계와 만나는 영역은 모두 인정한다. 부케티스는 인간이 형이상학적 질문을 던지는 것 조차 생물학적 여건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인간의 모든 문화적 삶까지도 생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인간 문화가 나름의 진화적 메카니즘을 갖고 있음은 인정한다. 다음 시간에 더 살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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