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Scriptorium

 Logged members : 0
 Total 362 articles , The current page is 1/25 Login Join  
   View the article
  신기철 ( http://dieBildung.net ) Date : 2008/12/11  Hit : 8291  Recommend : 713   
 [[예술철학]] 서론 강독 40주차 - 23.28~24.14
08.12.10.
강의: 강유원
필사: 신기철

*

칸트 철학에서 감성적 취미 판단의 특징은 '무관심적 관심'과 '몰개념적 지성과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이다. 이들이 '주관적 보편성'으로 전개된다. 이러한 칸트의 사상을 미학주의로 파악할 수 있으며, 정치철학의 맥락에서 보면 미학적 정치철학으로 해석할 수 있다.

랑시에르는 칸트의 감성적 경험이 가지고 있는 새로운 체제에 대한 사유 가능성을 제안한다. 반면에 피에르 부르디외는 무관심적 관심을 이데올로기적 은폐장치로 간주한다. 이 점은 부르디외가 [[예술의 규칙]]에서 천사주의를 버릴 것을 요구하는 부분에서 명확하게 나타난다. 이를테면 플로베르를 하나의 champ(field)안에 넣고서 예술 작품 고유의 영역이 있다고 보는 것이 천사주의이다. 부르디외는 천사주의적 관점을 버리고 계급적 관점에서, 문화 자본의 관점에서 볼 것을 제안한다.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말미에서 '정치의 미학화'를 언급한다. 같은 맥락이다.

이번 강독 초반에 부르디외와 같은 시각에서 논의하는 것을 예술철학이라고 하자고 말하였다. 예술철학과 미학은 다르다. 헤겔은 미학이 아니라 예술철학을 논하였다.

랑시에르는 무관심직 관심을 '관심적'이라고 수용했다기 보다는 감각적 경험자가 처해있는 기존 질서에 대한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로운 상황을 이상화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감성적 상태가 가능한지가 의문스럽다. 랑시에르는 칸트의 논의에 기대어 자신의 주장을 전개한다. 헤겔, 칸트를 거장이라고 하면 마르크스, 포이어 바흐를 에피고넨(난장이)이라고 한다. 랑시에르는 에피고넨도 되지 않는다.

에피고넨을 논박할 때에는 두 가지 방법을 취해야 한다. 랑시에르가 기대는 것을 근원적으로 공격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피에르 부르디외 처럼 공격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르디외가 랑시에르보다 한 수 위이다. 부르디외는 신 칸트 학파 철학자 에른스트 카시러에 기대어 칸트를 공격하였다. 거기에 마르크스를 섞어서 문화자본 논의를 제기하였다. 말하자면 에른스트 카시러가 부르디외의 스승급이다. 이처럼 랑시에르가 근거하는 칸트의 기본 개념을 공격하는 방법이 있다.

다른 방법은 '새로운 체제에 대항할 수 있는 감성적 경험의 사유 가능성'이라는 랑시에르의 주장을 논박하는 것이다. 이 허약한 미학주의 입장은 논박하기가 수월하다. 피에르 부르디외를 가지고 오면 된다. 랑시에르가 부르디외를 비판하기 때문에, 되려 부르디외를 가져오면 된다. 혹은 랑시에르와 유사한 시도를 한 에피고넨을 가져와서 비교 검토 하면 된다. 이를테면 한나 아렌트의 [[칸트 정치 철학 강의]]를 가져오는 것이다. 아렌트는 칸트 [[판단력 비판]]에서의 공통감각에 근거한 반성적 취미판단에 근거하여 정치 철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논의하였다. 정치철학에 있어서는 한나 아렌트가 랑시에르보다 낫다. 랑시에르는 '새로운 체제'를 언급한다. 체제는 공동체를 전제해야 가능하다. 한나 아렌트는 정치 공동체는 너와 내가 통약 가능해야 성립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통약 가능성을 칸트의 반성적 판단력에 바탕을 두어 만들어 냈다. 랑시에르와 유사한 시도다.

랑시에르 - 무관심성에 근거.
아렌트 - 반성적 판단력에 근거.

정서적인 미학적인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을 반성적 판단력이 가능하게 한다. 그것에 근거하여 정치적 공동체의 합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한나 아렌트의 주장이다. 그래서 수월하다. 랑시에르를 접하는 순간 아렌트 짝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무관심성을 가지고 정치철학을 논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 정치철학이라고 말하려면 내가 너에게 전해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공공의 영역으로 나와야 한다. 공공의 영역으로 나왔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의 메카니즘이 나와야 한다.

랑시에르의 경우와 비슷한 사례로 [[제국]]을 쓴 네그리가 제기하는 '다중'이 있다. '다중'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뜻하는데, 현대사회의 대중과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

지난 번에 헤겔 예술 개념에 세 가지가 있다고 말했다. 상징적 예술, 고전적 예술, 낭만적 예술. 이 세가지는 역사적으로 무관한 고유의 양식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헤겔은 인류가 상징적 예술에서, 고전적 예술로, 나아가 낭만적 예술로 진전해왔다고 파악한다.

헤겔에 따르면 '내용과 형식의 완전한 합치'라는 Ideal이념상을 추구Erstreben하는 것이 상징적 예술이고, 이념상을 성취Erreichen한 것이 고전적 예술이며, 초월Ueberschreiten한 것이 낭만적 예술이다. 따라서 낭만적 예술 형식은 예술의 종말이다. 낭만적 예술 형식 다음의 것은 예술이 아니라 다음 단계인 종교이다. 예술의 궁극목적이 예술 아닌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변증법적 전개 과정이다. 변증법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맹아를 완전히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가진다. 실현 후 원점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벗어나 질적으로 전혀 다른 영역으로 넘어간다. 자기 안의 맹아를 완전히 실현하여 자기를 부정하고 넘어가는 바 이를 '자기내초출自己內超出'이라고 한다.

낭만적 예술은 예술의 자기 초극, 예술 아닌 것으로 나아감에 따라 das Neue새로운 것이 등장한다. 이 새로운 것은 어디 숨어있었으며 앞으로 무엇이 되는 것일까? 자기초극이라고 하면 자기가 자기를 밟고 올라가는 것 같다. 정확하게 말하면 자기내초출이다. 자기 안에서 에너지를 길어서 자기를 넘어서는 것이다. 자기를 부정하고 넘어가는 것이다.

헤겔은 이념상을 상징적 예술에서 추구, 고전적 예술에서 성취, 낭만적 예술에서 초월한다. 상징적 예술을 즉자적 정신에, 고전적 예술을 대자적 정신에, 낭만적 예술을 즉자대자적 정신에 대입할 수 있을까? 그런데 즉자대자적 정신에 상응하는 것은 낭만적 예술이 아니라 내용과 형식의 통일을 이룸으로써 이념상을 성취한 고전적 예술인 것처럼 보인다.

-

마르크스에 따르면 역사는 원시 공산 사회 -> 봉건제 농노 사회 -> 자본주의 사회로 발전한다. 경제적 관점에서 본 역사 발전 단계이다. 역사법학파 사비니 등이 만들어낸 것이다. 위에서 헤겔의 예술 양식들을 각각의 정신에 대입히켰듯이, 역사 발전 단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하나 있어야 한다. 어떤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인가.

헤겔 역사철학의 이념은 '인간 자유의 성취'이다. 헤겔에 따르면 동양에서는 한 명만 자유로왔고,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몇 명만이 자유로왔으며, 헤겔 당대 독일에서는 모두가 자유롭다. 헤겔은 인간 자유의 성취를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것이 '보편적 진리에로의 고양'이라고 주장한다. 마르크스도 인간 자유의 성취를 역사의 이념으로 파악한다. 다만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경제적 소외 상태에서 벗어날 것을 제시한다. 헤겔이 정신주의적 해결책을 내놓았다면 마르크스는 물질주의적 해결책을 내놓은 것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력이 완전히 발현된 가운데 자본주의 사회를 뛰어넘을 수 있는 맹아가 자본주의 내부에서 나온다. 이를 자기내초출이라고 한다. 그래서 공산주의로 가려면 자본주의 거쳐야 한다. 그래서 레닌이 신경제주의를 편 것이다. 마르크스나 레닌이나 기본적으로는 자본주의 발전이 완전히 이루어져 인간이 자연을 완전히 지배한 다음에 자유로울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들은 생산력 중심주의에 입각한 것이다. 공산주의는 외면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자기 안에서 나온다. 그래서 [[경제학 철학 수고]]에도 나오듯이 공산주의는 끊임없이 형성 중에 있는 운동이다.

-

도대체 어떻게 해야 기존의 것을 편력하고서 새로운 것으로 자기내초출을 할 수 있을까, 심각한 문제이다. 자기내초출의 결과가 새로운 내가 되는 것인지 여전히 나인 것인지도 문제이다.

도토리가 참나무가 된다. 참나무는 도토리가 아닌 것이다. 어떻게 해서 도토리는 참나무가 될까. 어떻게 해야 도토리는 참나무가 될 수 있을가. 또 어떻게 해야 자본주의 사회는 공산주의 사회가 될 수 있을까. 도토리가 없으면 참나무는 될 수 없다. 그런데 참나무와 도토리는 전혀 다르다. 양자의 정체성의 연결고리가 무엇인가.

도토리에는 외부의 것이 들어온다. 물, 햇빛. 자본주의가 공산주의가 되도록 만드는 물과 햇빛에 해당하는 것은 뭘까. 가만히 있어도 공산주의 사회가된다는 입장이 있다. 경제학적 결정론자들의 입장이다. 뭔가가 필요하다는 입장도 있다. 이를테면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발적 혁명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무엇이 이를 가능하게 하는가.

변증법이 가진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이론적 차원에서의 변증법은 'A≠-A' 즉 모순율을 부정하고 모순을 긍정한다. 이에 A=-A라고 주장한다. A와 -A를 동일한 차원same dimension에서 보면 A=-A일 수 없다. A=-A로 보려면 A와 -A를 계기로서 가지는 전체의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

A와 -A는 동일한 사태Sache의 두 측면이다. 양자를 자신의 계기로 가지는 전체에서 보면, A와 -A는 서로 대립,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 입각하여 정치철학 맥락에서 보면 변증법은 모순, 대립하는 것을 모두 인정하고 가자는 지극히 보수적인 태도가 된다. 이와 달리 [[정신현상학]]의 도정을 생각해보라. 감각적 확실성에서 출발하여 절대적 지까지 간다. 더 나은 것, 새로운 것이 등장하는 과정이다. 이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완성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로부터 더 나은 뭔가 새로운 것이 등장할 수 있는 싹이 이 안에 있다는 논의가 가능하다. 이때 변증법은 혁명의 방법론이 될 수 있다. 변증법에서는 이 두가지가 모두 이야기될 수 있다. 어떤 측면을 변증법의 진수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일 것이냐에 따라 썩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겠다.

도토리는 자기가 참나무가 될 것을 모른다. 그러나 도토리가 참나무가 되는 것을 본 사람은 도토리에서 참나무가 될 것을 보는 것이다. 그러면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가 나올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가 문제시 된다. '네가 봤느냐'고 따질 수 있다. 독단적 역사 형이상학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칼 포퍼가 비판한 지점이다. 헤겔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가지고 자신의 이론을 정당화하려 한다는 것이다. 냉정하게 살펴보면 헤겔 철학은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역사주의, 목적론이다.

상징, 고전, 낭만, 이 예술의 삼중성이 전반적으로 어떠한 맥락에 있는가를 보면 마르크스의 역사적 변증법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도 된다. 기왕 공부하는 것 여러 맥락을 살펴 공부하기 바란다.


*

23.28~31 이러한 관계는 세 가지 이다: 첫 번째 관계는 이러한 참된 통일의 추구이며, 절대적 통일에의 노력이며, 예술이거니와, 아직 이러한 완전한 관철에 이르지 못한 예술이며, 합당한 내용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고 그에따라 합당한 형식을 발견하지 못한 예술이다. 이러한 추구는 따라서 참된 내용과 참된 형식이 아직 발견되지 않고 하나가 되지 않은채 서로간에 아직 떨어져 있고 아직 외면성을 서로에게 보여주는 것 안에서 성립한다. 내용은 다소간에 추상적이며, 흐릿하고, 자기 자신안에서 참되게 규정되어 있지 않으며, 아직 외면적이고 아무래도 좋은 것으로서의 형태는 직접적이고 아직 자연적인 형태이다. 따라서 이러한 것이 첫 번째 일반적인 규정이다; 내용은 흐릿하고 추상적이며 구상성의 측면은 아직 직접적 자연으로부터 취해진 것이다.


*

23.28 이러한 관계는 세 가지 이다: 첫 번째 관계는 이러한 참된 통일의 추구이며, 절대적 통일에의 노력이며, 예술이거니와, 아직 이러한 완전한 관철에 이르지 못한 예술이며, 합당한 내용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고 그에따라 합당한 형식을 발견하지 못한 예술이다.

"노력Streben" - Erstreben은 무지하게 심하게 노력하는 것이다. 상징적 예술형식이 Erstreben이다. 암기사항이다.

호토 - "a) 절대적 통일을 향한 노력 또는 상징적 예술"


23.29 이러한 추구는 따라서 참된 내용과 참된 형식이 아직 발견되지 않고 하나가 되지 않은채 서로간에 아직 떨어져 있고 아직 외면성을 서로에게 보여주는 것 안에서 성립한다.

호토 - "이러한 노력의 원인은 그러나 내용 자체에서의 아직은 불완전한 규정성이다."
"규정성Bestimmtheit" - 일본에서는 '피규정태(규정된 것)'으로 번역한다.


23.30 내용은 다소간에 추상적이며, 흐릿하고, 자기 자신안에서 참되게 규정되어 있지 않으며, 아직 외면적이고 아무래도 좋은 것으로서의 형태는 직접적이고 아직 자연적인 형태이다.

헤겔은 내용과 형식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 아직 합치되지 않았으니 "아무래도 좋은 것"이고 "직접적이고 아직 자연적"인 것이다.


23.31 따라서 이러한 것이 첫 번째 일반적인 규정이다; 내용은 흐릿하고 추상적이며 구상성의 측면은 아직 직접적 자연으로부터 취해진 것이다.

이게 앞 내용을 정리한 이야기이다.

호토 - "따라서 그것[내용]의 형식은 직접적 자연성의 매개되지 않은 것이다."

헤겔에서 상징적 예술을 간략히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다: 헤겔에 있어서의 예술은 내용과 형식의 합치라는 이념상에 비추어볼 때 세 가지 양식을 가지고 있다. 상징적 예술양식은 이념상을 추구하는 양식으로서 아직 내용과 형식의 합치가 불완전한 규정성에 있으며, 형식은 그에 따라 아무래도 좋은 것이요, 외면적이며 무매개적이고 자연적인 것이다.


*

24.1~14 따라서 이러한 첫 번째 규정은 예술의 노력과 추구인데, 이것은 더 자세히 보면 아직 참되게 자체 내에 규정되지 않은 사유는 아직 그 자체로 외면적이고 자연적인 소재를 사용하지만, 이것[소재]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자연형상 자체를 비자연적으로 만들고 일그러뜨리고 자연 형상 안에 척도 없는 것을 집어 넣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형태들 안에 우리는 의욕된 것으로서의 보편자를 본다. 그러나 내용은 자기 자신 안에서 규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내용은 자신의 표현을 자신의 규정성 너머로 밀고 나아간다. 따라서 이러한 예술에 속하는 것은 숭고이지 아름다움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예술에서 내용과 형태의 관계에 상응하는 것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형태는 과연 폭력을 입고, 억지로 일그러진다. 그러나 이 형태화에서 그럼에도 또한 하나의 거대한 내용에 일반적인 방식으로 걸맞을 수 있어야 한다는 하나의 규정이 놓여 있다. 내용이 자연적 소재에 여전히 참되게 걸맞지 않거니와, 내용 자체는 이러한 걸맞음에 아직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응성은 다만 하나의 추상적 규정성안에서만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첫번째 영역은 상징적 혹은 동양적 예술을 제공한다. 이것[상징적 혹은 동양적 예술]은 숭고에 속한다; 그리고 숭고의 특성은 무한한 것이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무한한 것은 여기에서 그러나 추상적인 것이요, 어떠한 감각적 형태도 그것[무한자]에 걸맞지 않는다; 감각적 형태는 따라서 자신의 척도를 넘어서 나아간다. 거기에는 표현의 추구만이 있다. 백개의 활과 백개의 가슴을 가진 거인과 거상은 따라서 그러한 척도 없는 자연형상이다.


*

24.1 따라서 이러한 첫 번째 규정은 예술의 노력과 추구인데, 이것은 더 자세히 보면 아직 참되게 자체 내에 규정되지 않은 사유는 아직 그 자체로 외면적이고 자연적인 소재를 사용하지만, 이것[소재]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자연형상 자체를 비자연적으로 만들고 일그러뜨리고 자연 형상 안에 척도 없는 것을 집어 넣는 것으로 나타난다.

"척도" - 조화나 통일에 해당한다. "척도 없는 것을 집어 넣는 것"은 척도 없이 무작위, 무제한적으로 자연 형상을 가공해낸다는 뜻이다.

호토 - "무규정적 내용은 자신의 형식 자체를 무규정적으로 만들고 그 형식을 척도 없는 것으로 일그러뜨린다." (번역본에는 누락되었다)


24.2 이러한 형태들 안에 우리는 의욕된 것으로서의 보편자를 본다.


24.3 그러나 내용은 자기 자신 안에서 규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내용은 자신의 표현을 자신의 규정성 너머로 밀고 나아간다.


24.4 따라서 이러한 예술에 속하는 것은 숭고이지 아름다움은 아니다.


24.5 그렇지만 이러한 예술에서 내용과 형태의 관계에 상응하는 것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24.6 형태는 과연 폭력을 입고, 억지로 일그러진다.


24.7 그러나 이 형태화에서 그럼에도 또한 하나의 거대한 내용에 일반적인 방식으로 걸맞을 수 있어야 한다는 하나의 규정이 놓여 있다.


24.8 내용이 자연적 소재에 여전히 참되게 걸맞지 않거니와, 내용 자체는 이러한 걸맞음에 아직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24.9 상응성은 다만 하나의 추상적 규정성안에서만 있을 수 있다.

아직 형태와 내용이 걸맞지 않기 때문에 이 단계에서는 내용과 형식이 서로 상응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 규정에서만 가능할 수도 있다.

호토 - "예술의 내용이 아직 참되게 구체적인 것이 아니므로, 내용의 형식의 상응또한 다만 하나의 추상적 상응이다: 그것이 상징이다.


24.10 이러한 첫번째 영역은 상징적 혹은 동양적 예술을 제공한다.


24.11 이것[상징적 혹은 동양적 예술]은 숭고에 속한다; 그리고 숭고의 특성은 무한한 것이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4.12 이 무한한 것은 여기에서 그러나 추상적인 것이요, 어떠한 감각적 형태도 그것[무한자]에 걸맞지 않는다; 감각적 형태는 따라서 자신의 척도를 넘어서 나아간다.

무한자를 표현하는 것이 숭고함이다. 무한자는 추상적인 것이다. 추상적이다보니 감각적 형태가 무한자에 걸맞지 않는다.


24.13 거기에는 표현의 추구만이 있다.

표현의 완성은 없다. 노력만 하는 것이다.


24.14 백개의 활과 백개의 가슴을 가진 거인과 거상은 따라서 그러한 척도 없는 자연형상이다.

무한자를 표현하고자 하는 참된 이념이 있고, 이를 표현하기 위하여 자연형상을 가지고 온다. 이때 과장되고 일그러진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상징적 예술의 형식이다.

무지하게 많은 무한한 능력을 표현하고자 할 때 '백개' 등의 표현을 쓴다. 의욕이 앞서는 경우.

형상은 철딱서니 없더라도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은 참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물을 수도 있다.

Next   [[예술철학]] 서론 강독 41주차 - to be edited 신기철
Prev   [철학적인간학] 15주차 -上 신기철
LIST   RECOMMEND


Copyright 1999-2019 Zeroboard / skin by weki

© 2003 - 2008 dieBildung.net |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