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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기철 ( http://dieBildung.net ) Date : 2012/04/02  Hit : 4508  Recommend : 439   
 [철학적인간학특강] 5강
철학적인간학특강 5강
2012년 4월 2일@31309
강의: 손동현
발표: 변연경
필사: 신기철
검토: 손동현

현재 논의에는 존재론적 문제와 인식론적 문제가 연계되어 있다. 까다롭다. 그래서 천천히 꼼꼼하게 점검하고 있다.
*
"지각은 실재를 증언해주는 자이다. 어떤 질적 측면이 지각되든 간에, 지각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실재에 대한 의식이다; 그리고 어떠한 판단이든 실재에 관한 판단이라면 - 즉, 그것[판단]이 실재와 비실재를 구별해낸다면 - 그것[판단]은 감각의 증언이 뒷받침해 주는 것에 의존된다." (15쪽 맨 아래)

지각이라는 현상을 부인한다면 모를까, 하나의 사태로 승인한다면, 지각은 우리 주관과 독립하여 외부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있음을 증언해주는 자이다. 지각은 어디에 의존되어 있나, 감각이 증언해주는 것 즉 실재에 의존한다. 감각이 증언해주는 것 그것이 얼마나 뒷받침해주느냐에 달려 있다는 의미이다.

첫 시간부터 되풀이 되어 만나게 되는 생각인데, 하르트만은 이 세계에 대한 경험은 세계 자체에 대한 경험이지 우리가 의식 속에서 스스로 만들어낸 경험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감각은 '무엇'에 대한 경험이며 그때 '무엇'은 실재reality이지 허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뜨거운 물에 손을 넣고 “앗, 뜨거워!”라고 소리칠 때, 과연 무엇이 뜨거운 것인가? 물이 뜨거운 것인가, 손이 뜨거운 것인가, 내가 뜨거운 것인가? 과학에서는 어느 정도 물리화학적으로 물의 뜨거움을 기술한다. 분자의 운동 등으로. 그러나 이것이 감각 지각 내용은 아니다. 뜨거움의 느낌을 현대심리철학에서는 mental event, something mental이라 규정하기도 한다.

뜨거움에 대한 의식은 뜨거운 물, 그 자체에 의존한다. 물의 분자운동에 의존한다. 그런데 이때 trans-causal-relation을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는 물이 뜨겁다고 하나 물 그 자체가 스스로 뜨거운지 어떤지 아는가? 물의 분자운동은 그 자체에 대해서는 뜨거운지 안 뜨거운지 모른다. 뜨거움이라는 느낌은 우리가 갖고 있다. 뜨거움이라는 의식 내용과 분자운동 사이에 과연 causal relation이 있는가? 당연히 있다고? 과연 그것이 남김없이 환원적으로 설명이 되는가? 되면 좋겠다. 그러나 남김없이 설명되지 않는다. 어느 정도 대응관계는 밝힐 수 있지만. 왜 그렇게 대응하는가? 왜 특정 분자운동 상태에 손을 넣으면 뜨거운 느낌을, 혹은 차가운 느낌을 받는가? 그 분자운동과 떠거운 느낌 사이에 필연적 인과관계가 있는가? 있다고 보는 것이 상식이고 우리의 과학이지만, 존재론적으로 보면 필연적인 것은 없다. 그래서 여기에서 'trans-causal'이라는 표현을 썼다. trans-causal이란 인과관계 너머에 있다는 뜻이다. 논란거리이다.

consciousness를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훗설적 의미와는 어떻게 다른가? 여기에서는 그야말로 의식내용을 뜻한다. 훗설에서 말하는 의식과 다를 것 없다. 훗설에서는 '선험적' 의식이 많이 강조되긴 한다. 여기에서 다루는 '경험적' 의식보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보면 여기서의 의식과 훗설에서의 의식이 다를 것 없다. 불교 유식철학에서처럼 훗설은 의식의 여러 단계를 제시한다. 선험적 의식까지 논의한다. 칸트도 마찬가지이다. 칸트는 선험적 통각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선험적 통각은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통일시켜 느끼는 것을 뜻한다.

훗설처럼 의식의 맨 깊은 데를 선험적 자아라하면, 세상과 만나는 표피의 의식은 뭘까? 지각perception이다. 현대 심리철학에서 예로 드는 고통pain, 가려움itching을 가지고 이야기해보자. 아픈게 mental한 것인가? 그것은 physical한 것 아닌가? 아픈 것은 신체의 현상이니까. 그러나 엄밀히 생각해보면 손이 아픈게 아니라 내가 아픈 것 아닌가. 아픔을 느끼는 것은 손이 아니라 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보면 손은, 손의 피부는 나와 다른 어떤 것인가? 그렇지 않다. 나의 표피이다. 나라는 존재가 있다고 할 때 내가 외부의 물질세계와 만나는 곳이 있는 것이다. 다섯 가지 감각, 거기서 '나' 라는 존재의 물리적, 물질적 측면이 참여한다. 외부세계를 경험하려면 '나' 라는 자아 중에서 맨 표피에 있는 물리적, 물질적 층위가 세계와 접촉해야 한다. 즉 세계를 들으려면 고막이 울려야 하고 뜨거운지 알려면 피부가 가서 닿아야 한다. 표피는 피부, 맨 심층은 - 칸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 내가 닿을 수 없는 'X'이다.

의식에는 주관의 개입이 없는가? 그렇지 않다. 주관의 개입이 없으면 지각perception이 있을 수 없다. 하르트만의 철학사상은 그런 점에서 상식적이다. 우리의 모든 인식을 주관과 대상의 관계로 파악하였다. 생각을 진전시키면, 주관이라는 것도 물리적, 물질적 표피가 외부세계의 물리, 물질적 속성과 만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보면 물리적인 것으로 전부 분석해서 설명할 수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가렵다는 것은 신경섬유의 교란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외부로부터 자극이 주어지면 homogene한 감각이 받아들여 느낀다고 설명할 수도 있다. 그렇게 설명하면 신경 변화 그 자체가 가려움, 아픔이라는 느낌과 같은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런데 그 느낌과 신경섬유의 교란이 과연 같은 것인가. 이들은 외부세계로 환원되지 않지만 내부 주관세계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심리철학에서 환원불가의  qualia에 대한 논의가 이와 연관된다

나는 이런 점에서 베르그송의 통찰의 유의미하다고 본다. 베르그송은 우리 자아에 깊이가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세계를 경험하는 데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다. 세계는 단속되어 있지 않고 연속되어 있다. 세계의 표피에는 자아 중에서도 비본래적인 자아가 작용한다. 그것이 우리의 물리적, 물질적 측면이다. 신체, 신체 중에서도 아주 표피. 거기에서 시작해서 순수자아, 순수의식까지 간다. 이처럼 자아에 깊이가 있다. 어떻게 깊이를 더해 가는가, 그건 알 수 없다. 그걸 알고 싶어서 언어현상가지고 규명하려하는 언어심리학 분야가 있다. 신경생리학 분야도 있다. 여전히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이 문제 자체는 오늘날 심리철학의 mind-body문제를 미해결인 채 그대로 가지고 가는 것인가? mind-body문제에 해결책을 가지고 하르트만이 출발했다고 볼 수는 없다. 하르트만이 오늘날 mind-body문제에 대해 한 마디 한다면? 추측하건대 '그 답 안나오는 문제에 왜 그리 집착하는가? 당신들은 해명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해명 못할 것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폄하에 그치지 않고 '해봐라'라며 용기를 북돋아주긴 할 것이다.

'의식'은 과연 무엇인가? 'consciousness'란 도대체 뭐냐? 어원을 따지면? 모아-안다는 것 con-sciousness니까 우리말로도 '의식'이라고 번역한다. 독일말로는 더 명료하다. Be-wusst-sein이다. wissen(알다)이 어근이다. 독일어에 접두어 'be-'가 붙으면 어떤 활동 결과가 긍정적으로 모아 있는 것이라는 뜻이 담기기도 한다. 그래서 Bewusstsein은 우리말로 하면 의식이지만 독일말 어감을 잘 살리면 '알고 있음'을 뜻한다. 'bewusst'가 과거분사형이니 'Bewusstsein'은 '알고 있음' 정도의 의미인 셈이다. 즉 외부세계에 대해 알고 있음, 또는 나 자신에 대해 알고 있음, 그것이 의식이다. 의식에는 주관이 있어야 한다. 안다고 한다면 '무엇이'(주관) '무엇에 대해'(대상) 알아야 한다. 따라서 의식에는 자연히 주관이 개입한다. 그렇다고 주관이 픽션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대상이 전제된다. 자의식도 마찬가지이다. 반성할 때 반성하는 나와 반성되는 나는 두 가지 요소로, 두 가지 pole로 참여한다고 봐야 한다.

하르트만의 출발점은 주관과 대상의 관계이다. 그런데 대상이 또 다른 주관이 될 때, 즉 타인의 경우는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 그 얘기도 한 번 나왔다. 이를테면 컵은 수동적이다. 대상은 어디까지나 대상으로 취급된다. 어디서? 학적, 과학적 탐구에서. 과학자는 나를 볼 때 손동현의 인격이나 자아는 안중에 두지 않는다. 과학자는 과학적 탐구 대상의 자료로서 현상을 파악한다. 그래서 대상을 'ob+iectus(마주하여 서있다)'라고 한다. 과학은 대상으로서의 나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지 진정한 나에 대해서는 탐구하려 하지 않는다. 학적으로 뭔가를 인식한다는 'cognitive act', 즉 지적, 인지적 활동은 정신이 수행하는 활동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그 활동만으로는 타인의 활동을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하려면 내면의 작용이 필요하다. 이를 인식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막스셸러는 이를 Sympathie(syn-pathos); 同情, 共感이라 하였다. 이를 받아들여 하르트만은 '정감적 활동emotionale Akte'라 명명하였다.

본 교재 어디서부턴가 'consciousness'대신 'awareness'가 등장한다. 양자는 어떻게 구분되는가? 영어로하면 'aware'는 '안다'는 것이다. 'aware'는 대상화된 무엇을 선명하게 아는 것이다. 'consciousness'는 아주 표피적인 데에서는 대상과 주관이 겹쳐지는 지점에 관한 지칭일 수 있다. 즉 양자가 구분되지 않는 영역도  준의식/ 잠재의식일지언정 의식 ('consciousness')이라고 할 수 있다.

앗뜨거! 뭐가 뜨거워? 물이 뜨겁지, 그런데 저는 안 뜨거워? 밀착되어 있는 거지. 이럴 때 'consciousness'를 사용한다. 철학자들은 이렇게 구분되지 않는 지점에 대해서도 면도칼로 정교하게 다듬으려 한다.


*

"선천적 인식은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것에만 적용되지만, 실재에 적용될 때는, 모든 내용과 관계들을 조회하는 지점에서 지각을 전제한다"(16쪽)

선천적 인식에 있어 인식의 범주는 universal, necessary한 것이다. 이것이 실재, 그러니까 인식하는 대상과 연관할 때에는 존재범주라는 의미이다. 선천적 인식이 가진 인식범주가 실재를 인식할때 적용되면 reference를 어디에서 구하나? 지각에서 구한다. 보편적 필연적인 것에 적용하려면 reference가 필요하다. 'refer to something', 즉 뭔가 참고, 조회해봐야 한다. 선천적 인식도 지각perception에 조회해 보아야 확인된다. 조회내용은 존재 그 자체, 실재 그 자체에 뿌리를 둔다. 국정원 같은 곳에서 맘대로 조작하는 거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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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은 객관적으로 현실의 증거이다. 어떤 관점에서 지각에 주관적 측면이 있다고 해도 그 핵심은 달라지지 않는다. 지각에 주관적 측면이 있더라도 지각은 앎의 원천이다. 지각에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성질들이 직접 대상에 속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해석의 주제[대상]가 된다는 것이 그 성질들이 실재를 지시한다는데 영향을 주지 않는다"(16쪽)

지각은 결국 주관과 대상의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단지 주관만의 날조가 아니라는 뜻이다.

"질이라는 것은 직접 주관에 복속되어 있는 이런 것으로 직접 사물에 돌려질 수 없다. 해석에 복속되지 않는 사물에 직접 돌려질 수 없다."

부정을 두 번 했다. 앗뜨거! 뜨거움이라는 quality, 이것을 주관과 무관한 대상 자체로 돌릴 수 없다, 환원시킬 수 없다. 주관이 개입한다.

"조금도 그것들이 실재에서 레퍼런스를 구한다는 것에 조금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 문장은 까다로우나 내용은 하나도 까다롭지 않다. 뜨거움이라는 지각내용은 분자운동이 활발한 물 그 자체로 환원되지 않는다. 여기에 주관의 interpretation이 개입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실재하는 사물에 우리가 조회를 해야 한다, 거기서 reference를 구해야한다는 사실을 훼손시키지는 않는다. 조금도 affect하지 않는다. 양쪽이 다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
"지각이 소위 '상대적'이라는 반박은 지각에 상호주관적 타당성이 없다는 해석이다. 그러면 후천적 인식은 현존재에 대한 직접적 확실성을 얻는 대신 개별적 상대성이라는 불이익을 얻는다. 게다가 이렇게 지각의 모든 것은 후천적인 것이고, 사유의 모든 것은 선천적인 것이라고 보는 것은 거짓이다."(16쪽)

누구는 뜨거운 물에 손 넣으면 기절하지만 나 어릴 때 할머니는 숯불도 손으로 집으셨다. 지각에 상대성이 있는 셈이다. 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지각의 상대성", 즉 지각은 각자 각자의 것이지 '간주관적 타당성intersubjective validity'를 갖는 것은 아니다.

지각은 후천적, 판단은 선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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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 대상과 인식 범주의 일치, 내가 지각해서 판단하기 이전에도 나는 노랑과 주황이 같은 계열 안에 있음을 이미 알고 있다. 빨강과 초록이 서로 보색임을 내가 그걸 보고 느끼지 않아도 이미 그런 관계에 있다.

지각내용은 상대적이다. 사람마다 다르다. 칸트는? 감각적 지각과 오성적 사유를 얘기했다. 감각적 지각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이를 오성적으로 재가공하면 일반적, 보편적 타당한 인식을 얻는다고 칸트는 주장했다. 잡다한mannigfaltig 감각자료를 모아 재가공하면 말이다.

칸트 식으로 접근하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잡다한 감각자료를 분류할 범주는 우리의 인식 안에 있다. 그런데 하르트만은 칸트의 입장과 다르다. 칸트에서처럼 우리가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범주가 그렇게 존재하기 때문에 분류할 수 있는 것이다. 지난 시간에도 얘기했지만 존재하는 세계는 그 자체의 원리에 따라 존재한다. 우리의 인식도 인식 자체의 원리에 따라 이루어진다. 이 때 양자가 합치하는 곳이 있다. 거기에서 보편타당한 인식을 얻을 수 있다. 즉 감각지각이 상대적이더라도 우리는 인식과 세계의 접점을 통하여 보편타당한 인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하르트만의 입장이다.

감각적 지각만 가지고서는 간주관적 보편타당성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흄과 같은 회의주의자들의 기본 입장이다. 그런데 흄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런 주장을 쉽게 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우리는 흄의 입장을 견지하지는 않는다. 왜? 일단 칸트에 따르면 그 감각적 지각내용도 아주 무질서는 아니기 때문이다. 시간, 공간이라는 선험적 형식이 있다. 즉 시간적 순차성, 공간적 배타성이 있다. 그렇게 해서 받아들인 것을 12개의 인식 범주에 넣으면, 거기에서 일반화시켜 보편타당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하르트만은? 존재의 범주와 인식의 범주가 합치하는 부분에서는 보편타당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우리가 감각적 지각 내용의 원뿌리를 외부세계에서 찾지만, 주관의 개입이 있어야 quality에 대한 감각을 얻는다고 해도, 따라서 주관이 개입해야 한다고 해도, 그렇다고 하여 일반적 보편타당한 지식을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실망할 일이 아니다. 주관이 개입하는 원리도 있고 사물이 존재하는 원리도 있는데, 그게 합치하는 부분이 있거니와 이를 보편타당한 지식을 얻기 위한 단초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 같이 생각해보자. 사물의 존재원리와 나의 인식원리가, 그러니까 존재범주와 인식범주가 합치하는 곳이 있다. 합치하지 않으면 죽지는 않더라도 사는 게 굉장히 어려워질 것이다. 합치하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상식적으로는 내가 세상에서 성공적으로 살고 있다는 점이다. 학적으로 따지면 과학science, 특히 자연과학이 성립한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부실공사로 무너지는 건물들을 봐도 알 수 있다. 자연의 원리와 자연에 대한 인식 원리가 합치하지 못했기 때문에 붕괴한 것이다. 합치하면? 자동차가 굴러간다. 합치안하면? 멈춘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안다는 것은 ‘할 줄 안다“(=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는 것이 행동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으면 앎으로서 가치도 없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뭔가를 인지하기 전에 해결되는 것도 많다. 소위 몸으로 때워 해결하는 것들도 있다. 이 세계에 대응하는, 적응하는 행동 및 대응원리가 있을 것이다. 인간도 그렇다. 인식원리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감정도 있고 의식도 있다. 바퀴벌레의 대응원리와 세계 자체의 존재원리가 서로 맞지 않으면 바퀴벌레는 멸종했을 것이다. 바퀴벌레는 나름대로 세계상을 갖고 있을 것이다. 세계는 one and the same world하나의 세계이다. 바퀴벌레와 인간의 세계상이 합치하지 않는다 해도 양 존재가 살아가는 세계는 하나이다. 그래서 바퀴벌레의 본능적 기제, 거기에 담긴 원리가 세계에 합치하니까 살아남는 것이다. 우리의 학적 원리도 세계에 합치하니까 성립한다. 종의 상대성은 어디서 극복되는가? 세계가 하나라는 사실에서 극복되는 것이다. 그러면 종들 간에 인식의 원리가 달라도 될까? 그것은 전적으로 타당하지 않는 것 아닌가? 물론이다. 부분적으로만 타당하다. 인간 삶 내부에서도 학적으로 인식하는 원리조차 적용 가능한 범위는 좁다. 100년 전만 해도 우리 동아시아에는 실증적 자연과학이 없었다. 자연현상을 이해하고 극복하는 게 없었던 것이 아니다. 기술은 더 뛰어났다. 화약, 종이를 서양에서 만들었던가?


로크의 제1, 2성질 구별

살펴보았듯이 quality는 주관과 대상의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주관이 스스로 만드는 것도, 대상 자체에 있는 것도 아니다. 단 quality의 핵심 중요부분이 주관에 더 가까이 있는가, 대상에 더 가까이 있는가, 그 차이이다. 일테면 로크가 이해하는 공간과 같은 제1성질은 사물자체에 있다고들 이야기한다. 그런데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옛날에 다니던 초등학교에 다시 가보면 커다랗던 운동장이 손바닥만해 보임을 알 수 있다. 일곱 살 때의 공감감각은 지금과 다르다. 공간도 제1성질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시간은? 시계위에 나타나는 물리적 시간은 같지만 세계에 대한 quality로서 우리가 느끼는 시간감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강의하는 교수에게 시간은 짧은데 학생에게 시간은 길다.

두 원리체계의 합치가 과학에서 입증된다. 그런데 제2성질에 관한 것도 그럴까? 과학에서는 제2성질을 다루지 않는다. 뜨거운 느낌을 다루지는 않으니까. 그렇다면 과학은 주관의 원리는 배제하고 대상자체의 원리만을 다루는 것이 아닌가하고 문제제기할 만하다. 그런데 그렇게 환원시켜서 정량적 관계로 세계를 재단하고 분석하고 인지하는데, 그렇게 하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고, 그 능력이 발휘될 때 그 능력이 발휘되는 원리, 작동원리는 어떠하길래 그런 것을 수용해서 무엇이 타당/부당한지 지적하는가? 논리주의자같으면 그것이 사고능력이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인간은 그와 같은 사고능력을 가지고 세계를 본다. 세계를 접하여 세계에 대해 이러저러한 지식을 얻는다. 그렇다면 논리주의자보다는 덜 정교하겠지만, 인식과 존재원리가 합치한다는 것을 논파하지 못하게 된다. 공격하기 어렵다. 하르트만 철학의 특징이기도 하다. 조금만 몰라도 자기는 모른다고 해버리니 공격하기 어렵다.


*

심신문제는 이원론적 문제로 알려져 있지만 겉보기에만 이원론적 문제이다. 하르트만에 따르면 표면 뒤에는 단일한 존재론적 바탕이 있다.
heterogeneous한게 결국에는 homogeneous한 하나의 세계 안에 있다는 주장이다. mind-body가 정말로 ontologically totally heterogeneous하다고 치자. 그러면 우리는 못산다. 몸과 마음이 이질적인 것으로 겉돌면 나는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세계도 두 세계가 된다. 서양철학은 희랍시대 때부터 세계를 둘로 보려 하였다.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유한한 인지능력으로 인해 그렇게 보여서 세계를 둘로 나눠 보았다. 정말 세계가 이질적인 둘로 나뉘어져 있으면 우리는 못산다. 인식능력 주제로 돌아오면, 우리의 의식을 mind, 대상세계를 body라고 했을 때, body를  mind가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러면 cognition이 성립할 수 없다. 막혀버린다. 그래서 mind-body-relation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다.

'supervenience'라는 용어가 있다. 심리철학자 김재권이 제시하였다. physical한 것 위에 mental한 것이 올라온다는 뜻이다. '수반'(隨伴)이라고 번역한다. 나라면 '상등(上登: 위에 등장한다)'으로 번역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하르트만이 만든 용어가 하나 있다. 웬만하면 독특한 용어 안 만드는 철학자인데. 'Superexistenz'(위에 나타난다)라는 용어를 쓴다. 이를 김재권의 'supervenience'의 선구로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인식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ontological basis가 있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

17쪽을 보면 'hiatus irrationalis'(불합리한 괴리)라는 라틴어가 나온다. 'hiatus'는 '괴리'라는 뜻이다. 이를테면 독일어 Umlaut를 통해 발음이 바뀌는 현상을 언어학에서 hiatus현상이라 부른다. 철학에서는? 뒤틀리는 것, 틀어지는 것을 뜻한다. 오래 된 한옥 집 문이 뒤틀리듯이 여기서는 mind-body가 아구가 맞아 떨어지지 않고 뒤틀려 틈이 생긴다. 그래서 양자의 관계를 모르겠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그런 이원성의 불합리한 괴리는 사태 자체가 뒤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때 뒤틀린다는 것이다.

마음과 몸은 우리가 학적으로 탐구해 보는 한 서로 다르다. 정말 heterogene하다. 그러나 사실의 세계에서, 현실적으로 양자는 착착 맞아 돌아간다. mind는 공간을 차지하지 않고, body는 공간을 차지한다. 그런데 공간차지 안하는 놈이 어떻게 공간속으로 들어가나. 현대심리철학의 대표적 문제는 mental-causation이다. 내가 일어나려고 마음먹으면 그것이 cause가 되어 몸이 움직이는 결과를 야기한다. 그런데 존재론적으로 따지면,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 사태가 공간을 차지하는 사태를 어떻게 야기할 수 있는가, 이게 아포리아다. 내가 마음먹는 것 자체가 머릿 속에, 등골 속에 미세한 신경변화를 야기해서 그런거라고들 주장한다. 마음을 먹기는 뭘 먹나, 있는 건 몸뚱이 뿐인데. 두뇌의 복잡한 구조를 몰라서 그렇다고 기능주의자, 환원주의자들이 그렇게 설명하려고 한다.

손동현은 하나이지만 손동현을 이해하는 방식은 둘 -몸과 마음- 이다. 둘 사이에 괴리가 생긴다. 스피노자도 얘기했다. 실체는 하나인데 나타나는 국면은 두 가지이다. 현대 심신론에도 double-aspect-theory가 있다. 인간의 삶에서 둘을 따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에 관하여 삶 자체는 하나라고 하르트만은 지적하려고 한다.

언어활동은 순전히 mental한 것인가? physical body action도 일어난다. 그 접점이 뇌이다. 언어현상을 잘 보면, 둘을 상당히 접근시킬 수 있다. 심적인 것과 신체적인 것의 근접적 현상이 언어현상 분석을 통해 가능할 것이다.
 신기철  ::  [2012/04/30] 선생님 검토후 보정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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