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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기철 ( http://dieBildung.net ) Date : 2012/04/29  Hit : 4306  Recommend : 436   
 [철학적인간학특강] 8강
철학적인간학특강 8강
2012년 4월 23일@31309
강의: 손동현
발표: 백송이, 최원빈
필사: 신기철


철학적 사유는 가장 정치한 것이다. 텍스트를 정확하게 읽어버릇해야 한다. 텍스트 읽고 뜻 알고 넘어가는 식으로만 읽으면 안 된다. 그러다보면 나중에 글 쓸 때도 그렇게 된다. 주변에 보면 철학 교수라는 사람이 여전히 비문 쓰는 경우가 있다. 젊었을 때 제대로 훈련받지 못해서 그렇다. 모르는 것은 오히려 괜찮다. 잘못 아는 것이 정말 문제이다. 정확히 읽어버릇해야 한다.


*

이법적 존재는 세 가지 관점에서 확인된다는 논의를 하고 있었다.


지난 시간에 ‘imminent apriority’의 ‘imminent’를 ‘immanent’의 오타로 간주하고 ‘immanent apriority’로 이해하자고 하였다. 그런데 전후문맥을 다시 따져보니 ‘imminent’로 파악할 여지가 있다. 즉 상호주관성이 확보되면, 즉 우리 모두가 그렇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그렇다고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선험적 인식 가능성이 ‘거의imminent’ 인증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imminent라고 말할 수 있다. '거의'라는 것, 따라서 잘못될 수도 있음을 내포한다. 상호주관성만 가지고 그것의 진리성이 확보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상호주관성만 가지고는 선험성이 '거의' 확보되지만, 최후의 보루로 즉자적 존재가 확인되어야 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거의 확인된 선험성은 더 깊은 분석이 필요없이 타당한 이법적 선험성이 아니다. 상호주관성에 근거한 이법성은 사실 관념적이다. 주관독립적 실재가 확인되기 전이기 때문이다. 가능성은 매우 높지만 최후까지 보장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임박한 선험성을 내용적으로는 상호주관적 차원에서 합치된('합의된'이라고 해야할까) 선험성으로 파악할 수 있다. 훗설이 들으면 '나를 또 저리 오해하는구나'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훗설에서 상호주관성이란 '합의'를 의미하지 않는다. 구조적인 것이다. 우리의 선험적 의식성을 말할 때에는 개연적 정도probability가 문제되지는 않는다. 하르트만에서 문제되는 것이다.

베르크마이스터가 강조한 ‘imminent’에 관하여 하르트만 [[Grundlegung]]을 뒤져보았으나 어떤 단어를 일컫는 것인지 딱히 찾아내진 못했다. ‘imminent’에 관해서는 일단 여기까지.


“이법적 존재의 상대적 독립성the relative independence of ideal Being”(26쪽)에서 ‘relative’의 의미 -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법적 존재의 독립성을 입증하는데에 이러저러한 논변이 있는데, 1) 그것이 관계적이며, 2)상대적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상대적’은 ‘실재의 주관의 관계의 상대성’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이법적 존재가 있다는 것을 뭘 보고 아는가? 있다고 주장은 누군들 못하나, 중요한 것은 논리적으로 설득하여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일진대. 이법적 존재가 있어야 실재 세계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것, 우리가 활동하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현실적으로 확인될 수 있지 않겠는가. 실질적 세계에서의 여러 현상들을 보니 이법적 존재가 없을 수 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모든 실질적 존재들에 대한 선험적 인식은 '객관적으로 보편적'이다"(26쪽)

1) 선천적 인식이 성립하는 것을 보면 ideales Sein이 있겠다고 생각할 수 있다.
2) 실질적인 실재세계에서의 우리의 인식과 활동이 성립하는 것을 보면, 그 실질적 세계에 적용되는 이법적 존재가 있을 수밖에 없겠다도 생각할 수 있다.
3) 실질적 세계에서의 여러 현상들이 우리의 사유를 지배하는 논리적 법칙과 맞아 떨어진다. 그러니까 논리적 법칙이라는 이법적 존재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지난 시간에 이런저런 버전으로 얘기했다. 이법적 존재가 확인되려면(즉 주관독립적으로 실재함이 확인되려면) 어디를 거쳐 간접적으로 입증되나, 실질적인 실재세계를 통해서이다. 실재세계를 보니 간접적으로 확인된다. 첫 번째도 연관된다. 선천적 인식은 분명 성립한다. 이점을 보면 이법적 존재라는 것이 단순한 관념적 사유가 아니라 그 자체로 있는 존재라는 것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하르트만은 'reales Sein옆에 동등하게 ideales Sein이 an sich하게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reales Sein은 primary하고 ideales Sein은 secondary하다. 베르크마이스터는 완전, 불완전이라고까지 말한다. 하르트만은 그렇게까지 말하진 않았다. 세계를 지적으로 인식하는 우리의 활동은 일차적이고 primary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몸으로 부딪히는 것, emotional, volitional한 것이다. 그러한 정의적 활동의 대상은 이법적 존재가 아니다. 예외가 하나 있다, 가치. 우리가 논리, 수학적 대상을 의지적으로 대하지는 않는다. 일차적이다, 이차적이다에 관한 여기서의 논의는 우리 삶에서 어떠한 것이 더 주된 것이냐에 대한 논의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다.


여러분들 나이쯤 지도교수로부터 들었다. 동아시아사람들은 ideal being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었단다. 무슨 뜻인지 몰랐다. 하르트만을 읽으며 그 생각이 난다. 로마 사람들은 ideal being에 대한 생각이 철저했다고 한다. 그분은 생전에 외마디 소리를 워낙 내뱉은 까닭에 대학원시절에는 도통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생각해보니 어느정도 타당한 소리다. 고등교육을 받고 훈련받지 않은 이들에게 ideales Sein은 나타나지 않는다. real being이 나타날 뿐이다. 시정잡배들은 그런 거 몰라도 잘 먹고 잘 산다. 동아시아문화가 과연 그러한 이법적 존재에 관한 이해가 없었는가, 동의하기는 힘들다. 로마인들은 실질적 실재 세계에 딱 부착, 결착되어있는 이법적 존재에 철저했고, 그에 대한 의식에 명확했다. 그런데 그것에서 조금만 멀어지면 이들을 도외시하였다. 그러한 점에서 로마의 문화는 현실적이었다. 우리의 감각에 주어지는 변화무쌍하고 개별적이고 개체적인 reales Sein 배후에 이들을 통괄하는 ideales Sein이 있다는 의식은 분명했다. 동아시아인들에게도 그러한 인식은 있었으나 추상적이었다. '도'! 도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식으로 추상적으로 사유하였다. ‘달도 차면 기울고’, ‘음 다음에는 양이 오고’ 등등, 이법적 존재에 대한 인식은 인식인데 real being 과의 밀착도는 떨어졌다. 음양오행설을 토대로 하는 역학, 64가지의 괘를 가지고 인생살이를 설명했다. 오늘날 우리의 눈으로 보면 과학적이지 않다. 원리적 측면에서 보면 real being과 ideal being의 결착, 부합에 있어 동아시아인들의 경우 느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힘이 없다. 우리 삶에 다가오는 힘, 파급력을 보면 부차적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실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이 얘기는 전적으로 옳다. 반면 다른 관점에서는 전혀 달라질 수 있다. 이를테면 극도의 주지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말이다. 플라톤은 오히려 반대로 말하지 않나.


“하르트만은 실재 영역에서 본질분석과 본질 법칙의 분석을 시도한 훗설의 공로를 높이 산다. 중요한 것은 이 본질들과 상호관계들이 추상이 아니라 실재 세계 속에서 발견되는 것들이라는 점이다. 현상학적 분석의 독특성은 본질 구조에 관한 긍정적 이해라고 할 수 있다. 본질 직관에서 드러나는 증거의 확실성에 대한 유일하고도 궁극적인 호소는 그 자체로 오류불가능하다는 전제이다. 그러나 적어도 참의 관계적 기준이 가능하다. 어떤 것이 오해된 곳에서 그것은 오해될 수 있음과 함께 시작되어야만 하며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은 그 자체로 어떤 것이다”(27쪽)

‘어떤 것이 오해될 때 그것이 오해되려면 엄밀한 의미에서 무엇인가가 그 자체로 있어야 한다.’(27쪽)
- 오해가 성립하려면 오해가 아닌 정해가 있어야 한다. 무엇이 거짓이라고 말하려면 참에 비추어야 거짓을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짓으로 판명된다는 것은 무엇인가가 참으로 있음을 전제한다는 것이 판명되는 것이기도 하다.

훗설의 본질직관에 있어 ‘Konstruktion’은 칸트와 대비시켜 ‘구성’이 아니라 ‘규정’으로 옮긴다. 일본식 번역이다만 적절하다. 한자로 표기하면 규정(規定)이 아니라 규정(規整), 즉 ‘잘 간추려 마무리를 잘 해서 살짝 올려놓는 것’정도를 뜻한다.

구성 - 주관적 의식활동이 사물을 엮어내는 것
규정 - 순수한 선험적 의식에 드러나는 본질을 보는 것

하르트만은 사물의 본질이 우리에게 드러난다는 훗설의 통찰을 이용하고 있다. 단순히 머리 속에만 있지 않고 실제로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찰은 포퍼에게서도 나온다. 어떤 명제가 있을 때 그것이 오류인지 참인지 분간할 수 없으면 학적 인식도 불가능하다. 사물의 본질을 직관한다고 하고서 본질직관의 내용이 항상 오류 가능하다, 다시 말해 내 직관이나 네 직관이나 언제든 다를 수 있다고 인정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우리가 이런저런 선험적 인식을 통해 직관해서 이러저러한 본질에 도달할 수 있다고 틀림없다고 말할 때 학적 인식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때 그 본질이 주관 밖에 있다고 말해야 한다. 하르트만은 사물의 본질과 인식작용 양자가 떨어져 있지 않다는 훗설의 입장을 이용하였다, 본질이 거기 있어야 직관이 가능하다는 것으로 도출해내었다.

우리의 자연과학과

"자연과학적 가능성(자연과학이 성립한다는 가능성, 사실의 세계와 합치한다는)은 논리법칙 일반(logical law in general)이 사유와 실재에 관해 사유와 실재에 관해 똑같이 동일함을 전제로 할때 가능하다."(28쪽)
- 논리법칙일반이 우리 사유에 관해서도 타당하고 실재 사물에 관해서도 타당하다. 그래야 자연과학도 성립하고, 우리의 인식도 앞뒤가 맞을 수 있다coherent. 그러지 않으면 우리의 인식은 coherent할 수가 없다. 우리의 사유는 합리적인데 세계는 비합리적이라면 앞뒤가 맞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이해못하는 것이 너무 많다. 이해못하는 것들을 일컬어 Raetsel, transintelleltuell, irrational 등으로 표현하였다.

논리법칙이 세계에도 우리의 사유에도 합당하게 작용한다. 그걸보면 논리법칙이라는 ideales sein이 세계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법적 존재가 실질적 존재와 관계있다. 그런데 이법적 존재가 실질적 존재에 의존되어 있지는 않다, 독자적으로 있다independent. independent하지만 그것이 확인되려면 그것이 실질 세계의 우회적 도움을 불가피하게 받아야 한다. 관계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독자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존재 성격자체는 독자적이지만, 그것이 확인되는 과정에서는 관련성을 갖는다. 그렇지만 indifferent, 실질적 존재의 간섭을 받아서야 비로소 이법적 존재가 존재하게 된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이다. 간섭은 받지 않는다.

‘논리법칙 일반’ = ‘본질의 이법적 법칙’과 동일한 의미로 파악할 수 있다.

또다른 이법적 존재인 ‘가치Wert, value’가 나온다. 하르트만은 ‘가치감Wertgefuehl’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가치를 지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적으로 느끼는 것이 우선이라는 의미이다. 막스셸러의 입장을 수용한 결과이다.

"가치감의 작용에 마주해있는 이법적 대상들"(28쪽) - 대상이란 마주해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처럼 표현하였다.

가치는 이법적 존재와 ‘같은’ 동질적인 부분들이다.

"회복 가능" - 되풀이될 수 있다, 반복 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항상 지속" - 초시간적 의미를 갖는다.

이법적 존재는 보편적, 불변하고, 초시간적이다. 실질적 존재는 개별적, 특유하고, 가변적 따라서 파괴가능하다. 시간을 타지 않는다는 것이 이법적 존재와 실질적 존재 간의 결정적 구분점이다.

"상호고립", 이해가 잘 되는가? '서로서로 별도'의 존재방식이라는 뜻이다.

independent는 의존되어 있지 않는다는 뜻. 그 자체로는 그렇지만, 그것이 확인되고 실현되는 과정에서는 dependent하다.
indifferent는 그 자체로 간섭받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최원빈 발표]

[질문들]

선험적 인식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범주는 결국 주관의 인식 내에 있어야 하지 않는가? - 답이 필요 없다. 보기 나름이다.


trans-causal-determination 초인과적 규정에 있어서, 몸과 마음이 분명히 붙어있는데, 대응하고, 그렇다고 몸의 현상이 마음의 현상을, 마음의 사건이 몸의 사건을 인과적으로 규정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 말할 수 없다. 왜? 존재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점은 틀림없다. 그러니 trans-causal-determination이라고 부르자. 데이빗슨은 이를 무법칙성일원론이라 했는데, 일원론이면 어떻게 무법칙성일수 있나, 줄타기이론에 불과하다.


하르트만은 이분법적 관계의 문제를 해소하고자 기존의 존재론적 지평을 해소하고 시간의 지평이 확장된 존재론을 제기하였다? 반대로 시간이 개입하지 않은 존재론은? 시간을 공간화시켜 이해하는 물질주의 등이 있겠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에는 시간적 요소가 있는가? 없다. 시간 타는 것은 믿을 수 가 없다. 다 배제해야 한다. 시간 타지 않는 것, 영원불변, 보편적인 일반적인 것을 찾아야 한다. 이를 이름하야 '본질'이라 불렀다. 반면 하르트만은 그러한 고전적 존재론의 전통도 받으면서 시간을 타는 real world도 따지자고 보았다. 시간은 그냥은 다룰 수 없다. 흘러가니까. 탐구를 하려면 붙잡아야 한다. 독일말로 개념을 Begriff라고 한다. be+greifen손에 움켜쥔다는 뜻이다. concept, conceive붙잡는다는 뜻이다. 떠내려가는 거 붙잡지 않으면 인식 못한다. 그러려면 멈추게 해야 한다. 시간을 파악한다는 것은, 흐르는 시간을 그 자체로 파악하는 것을 불가능하기 때문에 요즘말로는 냉동실에 집어넣어 얼려야 한다. 그 상태에서 t1, t2해가며 재야한다. 자연과학에서 다루듯이 말이다. 그래서 자연과학에서 다루는 시간은 베르그송처럼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시간이 흘러간 자국을 따지는 것이다. 또는 시계 위에서 측정되는 그러한 시간이다.


현대철학의 시작이자 헤겔 철학에 대한 대대적 반격, 시간성을 더 중요시하는 것이다. 즉 이법적 존재와 실질적 존재에 있어 실질적 존재를 더 중요시하는 것이다. 현대철학은 개체적, 구체적, 감각적, 시간타는 것을 더 중요시 한다. 그래서 실존철학 나오고, 마르크스 유물론 나오고, 프로이트, 다윈까지 나온다. 헤겔 세계상에 비추어보면 이는 세상 망조드는 것이다. 세계는 딱 질서지워져 있어야 하는데 정반대로 전개된다. 이것이 현대철학의 지형 변화이다.

ideales sein과 reales sein을 구별하는 기준은 바로 시간성이다.

하르트만은 고전철학을 잘 수용하면서도 현대철학을 위한 문을 열어 놓았다. 그런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철학자이다. 한스 바의 평가이다.

emotional한 측면을 세계에 대해 이해하는 또 다른 메카니즘으로 이해하면 어떨까? 앞을 내다보는 우리의 의식 활동이 우리의 사물 인식에도 관여할 것을 의미한다. 실재를 의식 속에서 강제한다. 그런데 앞을 내다보는 것 중에 망상도 있다. 앞을 내다보는 것이 제대로 된 것이 되려면 어떤 실재가 있어야 한다. prospektive Akt는 아직 없는 것이다. 아직 없는 것에 대한 인식이 있는 것에 대한 인식을 규정한다. 앞으로 올 것과 지금 있는 것 중 우리의 활동이 작용하여 바꿀 수 있는 것은 앞으로 올 것이다. 주어진 것은 내가 어찌할 수 없다. 앞으로 올 것은 내가 하기 나름이다. 그래서 중요하다. 앞으로 올 것에 대한 나의 기대, 이것이 지금 있는 현실에 대한 나의 인식을 심화시킬 수 있고 더 정확하게 만들 수 있다. 상식적인 얘기이다. boys be ambitious! 꿈이 있어야 현실을 나에게 맞게 바꿀 수 있다. 요즘에는 꿈을 갖지 말라고들 자꾸 얘기한다만.


이법적 존재들은 주관의존적 존재이지는 않을까?
- 하르트만은 아니라고 대답한다. 하르트만은 이러한 오해를 할 만하다고 인정한다.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거니와 Sosein의 관점에서 보면 reales Sein과 ideales Sein이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 Sosein과 Dasein구별은 Seinsmoment에 입각한 구별이다. 여기서 보면 Seinsweise에 입각한 차이는 무의미해진다. 그래서 ideales Sein은 내 관념의 소산이라고 결론내리기 쉽다. 반면 reales Sein과 ideales Seinrks의 구별은 Seinsweise에 입각한 구별이다.

나도 여러분들 나이 때에는 선험철학적 의식이 강했다. 헤겔 읽고 나니 기분이 좋았다.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4~50되서도 그리 날뛰고 다니는 것은 곤란하다만.


하르트만은 법칙성을 자연에 부여하면서 말로만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닌가? 결국 실질, 이법 양자를 주관이 매개하는 것은 아닌지?
- 가치에 관해서는 이 말이 맞다. 주관의 개입 없이는 두 영역이 관계를 맺을 수 없다. 그러나 나머지 영역의 경우 주관 없이도 양자는 관계를 맺는다. 여기에서 출구를 찾으려면 '왜 인간은 ideales Sein과 같은 것을 인식하기에 이르렀나'를 따져보아야 한다. 논리성이 세계에만 있고 인간에게 없다면 우리는 세계에 대한 coherent conscious를 가질 수 없다. 그런데 갖는 걸 보면 논리적 법칙이 세계도 우리 사유도 지배함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논리적 법칙성에 맞게 사유하는 능력은 왜 생겼는가? 바퀴벌레에게는 그런 게 없지 않는가. 물론 우리가 바퀴벌레는 아니라서 알 수 없겠지만, 그들의 행태를 보면 '알고' 한다기 보다 '몸으로'하는 것으로 보인다. 세계의 질서와 그들의 몸의 질서가 합치한다. 그래서 10억년동안 잘 살았다. 반면 인간의 경우 세계의 질서와 인간 몸의 질서가 합치하는 부분이 적다. 세계의 질서의 내면적인 부분까지 아는 능력이 길러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그렇다. 거기에서 주/ 객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법칙은 우리가 부여한 것인가 발견한 것인가? 이는 말이 달라서 그렇지 ‘닭이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은 문제인데, 이에 대해 진화론적 접근을 통해 어느정도 규명할 수 있지 않나,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고전 철학은 시간성을 배제하려고 한다. 발생론적 맥락을 거부한다. 그런데 근래 현상학은 다르다. 발생현상학이라 일컬어지는 분야에서는 발생적 관점에서 훗설 현상학을 재해석하기도 한다.

서울대 이남인 교수 박사 논문은 '본능의 현상학'이었다. 제목 만으로 주목 받았다. 거기에 발생론적 관점이 개입해 있다. 훗설에서 본질만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운동, 감각 등이 사물과의 어떤 관계에서 이루어졌는지 추론할 수 있다는 논의이다. 우리의 지적 능력만이 본질직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능에도 세계의 본질을 반영하는 것이 있다, 단순화하면 우리에게도 바퀴벌레와 같은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몸, 감각도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6. 진리의 규준

'참', '거짓'은 존재론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다. 인식론에서 나온다. 존재를 인식했는데 있는 그대로 인식하면 참, 그러지 않으면 거짓이다. 그래서 진리에 있어 출발점은 진리대응설이다. 인식 주관과 대상과의 일치adequatio를 따진다. ‘참true’은 독일말로 treffen, 과녁에 맞으면 참, 빗나가면 거짓이라는 식이다. 맞으면 맞고 틀리면 틀린 것이다. 참과 거짓은 주민투표로 결정되는 것 아니다. 진리의 규준은 인식적 관념(주관 안에 있는 사물에 대한 표상)과 인식된 대상(주관 바깥 사물)의 관계에서 성립한다.

감각 - 지각 - 표상 - 관념 - 개념
-우측으로 갈수록 더 보편, 확정, 일반적이다.

우리 의식에 주어진 그 무엇, 사물에 관한 그 무엇, 관념과 사물 자체의 관계에서 진리가 문제가 된다. 진리의 규준을 얻으려면 두 가지가 있어야 한다. 비교할 샘플이 두개는 되어야 참, 거짓을 판별할 수 있다.

가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가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상대적이지만 가치 자체는 절대적이다. 그래서 가치에 대한 인식에도 진위가 있다. 하르트만에서 가장 곤혹스러운 부분이기도 하다. 가치라는 ideales Sein의 an sich함을 입증하는 문제에 대해 이런저런 책까지 나올 정도였다.

우리의 인식이 참인지 거짓인지 확보하려면 가능한 한 많은 샘플을 확보해야 한다. 세계 전체의 context를 손에 넣으면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나의 인식이 타당한지 아닌지를 우리는 아주 절대적으로, 단언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우리는 확실성에 대해서 접근만 할 수 있다. 절대적 타당성에 대한 끊임없는 접근은 가능하지만, 절대적으로 타당한 인식을 갖는다는 보장은 없다. 접근만 할 수 있다. 칼 포퍼를 연상시킨다. 포퍼가 그랬다. 거짓임이 입증되면 언제든 물리지만 그 전까지는 믿는다는 것. 하르트만도 같은 입장이다.

"진리에 대한 규준은 의식안에 존재하는 동시에 밖에 존재한다"(29쪽)
- 인식은 주관과 주관독립적 대상관의 관계이기 때문에 인식이 주관의 독자적 구성작용이라면 대상은 필요 없다. 본래 대상과 관계하는 것이 인식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인식 작용 내부만 들여다보면 된다. 그래서 진리에 대한 세 가지 고전적 이론이 있다. 사물을 내가 있는 그대로 표상하면 참이다. 인식 대상과 인식 내용의 합치여부로 진리를 파악한다. 이를 진리대응론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의 인식이 의식 내부의 활동이라고 한다면 correspond할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 우리의 의식 내 활동의 앞뒤가 맞아야 한다. 이를 정합론coherence theory이라고 한다. 이게 합당한 대목도 있고 저게 합당한 대목도 있다. 또 다른 입장은 실용주의적 입장이다. 우리 사는데 도움되면 진리, 안되면 거짓. 지극히 상대주의적, 실용주의적 진리설pragmatic theorial truth이 있다.


서울가는 길 물어봤더니 두 사람이 와서 대답해준다, 선천적a priori과 후천적a posteriori. 양자가 합치하면 그것이 진리의 규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절대적으로 타당한 것은 아니나, 절대적으로 타당한 것에 상당히 근접한다고 믿을 수 있다.

우리가 적어도 학적 인식을 갖게 된다고 할 때 두 인식 방식이 합치된 그러한 내용을 학적 인식의 내용으로 삼는다. 감각적으로 지각된 내용만 가지고 히는 것도 아니고 순전히 선천적 내용만 가지고 하는 것도 아니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한 일, '선천적 종합판단은 어떻게 가능한가'는 synthetisch하면서도 a priori한 것을 찾으려는 시도였다. synthetisch하지 않으면 지식은 확장될 수 없다, a priori하지 않으면 지식은 확실할 수 없다. 이를 하르트만 식으로 가져오면 a posteriori한 것과 a priori한 영역을 찾는 것이다, 그것이 과학적 지식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인식의 두 가지 양상의 상대적 진리값은 최소한 진리의 절대적인 규준의 특성에 접근한다"(30쪽)
- 여기서 '상대적'이란 '절대적'까지는 아니라는 뜻이다. 절대적으로 가려면? 자료를 이리저리 긁어모아야 한다. 그래서 선천적으로도 후천적으로도 모두 합치한다는 것을 더 많이 보여주어야 한다.

하르트만은 온건하면서도 실용주의적 성격까지도 보인다. 인간이 세계에 가지는 지식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양자택일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느정도는 밝히고 어느정도는 못밝히고 있다. 접근해간다는 것이 옳겠다는 것이다. 선천적 인식과 후천적 인식이 합치하는 영역이 점점 늘어나면 그만큼 믿을만한 지식의 자산이 확보될 수 있다. 점점 늘려 나가는 것이다. all or nothing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 늘려나가는 길은 선천-후천 합치를 통해서이다.

세계는 우리가 알든 말든 그대로 있다. 그러면 선천적 인식은 왜 중요한가? 1+1=2를 알면 1억+1억=2억도 안다. 사과1개+사과1개=사과2개를 알면 사과1억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선천적 인식의 권능을 인정하지 않으면 사과를 2억번 더해봐야 알 수 있다. 선천적 인식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과도 관련되어 있다."(30쪽) 우리 지식의 확장은 알고 있는 것을 토대로 하여 아직 알지 못하는 것으로 확장되어간다.

그런데 알고 있는 거나 아직 모르는 거나 다 존재란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토대로 하면 알고 있는 것도 선천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요 그 내용은 사실은 Sosein이다. 즉 원리적인 것인데, 그것을 확보하면 아직 우리가 모르는 세계를 경험하기 전에 경험안해보고도 미리 그것에 대해서 뭔가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이를 외사법적 방법이라고 한다. 포퍼도 이런 얘기 한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의 Sosein을 확보하면 모르는 것의 Dasein을 알기 전에 Sosein은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Dasein은 경험해야 아는 것이다. 그래서 달나라 뒷면에 가지 않았어도 우리는 알고 있는 지식을 총동원하면 알 수 있다. 알고보면 상식적인 얘기이다.


선천적 인식의 길과 후천적 인식의 길, 두 길이 합치하는 곳에 우리가 믿을만한 참된 지식이 있다. 과학적 지식이 그것이다. 따라서 가능한 한 그 영역을 넓혀야 한다. 그래야 믿을만한 영역이 확장된다. 절대적 지식을 알 수는 없다. 접근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 지식은 반증되면 철저히 폐기해야 한다. 그 점에서는 하르트만이 포퍼와 동일한 입장이겠다.


더딘 발걸음으로 이제 겨우 1절을 마쳤다. 2절부터는 쉽다. 1절은 인식론과 존재론이 엉겨붙어있어서 어려웠다. 챕터 2보고, 3/4는 건너뛸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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