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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기철 ( http://dieBildung.net ) Date : 2008/03/17  Hit : 6471  Recommend : 696   
   Download #1 : 공동정신_16~17절발제.pdf (223.6 KB), Download : 124
 [공동정신] 2주차 - 16~17절
08.03.14. (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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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정신이 과연 존재론적 기초가 있는 실체적인substantiell 것인가, 혹은 허명에 불과한 것인가? 논란이 여전히 있다. 분석적 환원으로 인하여 공동정신을 실체적인 것으로 보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현대 심리철학의 입장이 정신을 존재론적 견지에서 파악할 때 정신은 가상적인 것, 허구적인 것, 사변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요즘의 심리철학에서는 materialism이 사라지고 physicalism이 주된 흐름을 이루고 있다. 기본 입장은 materialsim과 동일하다. physical한 것만이 존재, causal power를 가진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끝내 결정적으로 ‘그렇다’라는 결론을 내리지는 못한다. 일상인들이 사용하는 의미의 ‘정신’은 physical event가 보여주는 기능적인 것에 불과하다. physicalism의 입장에서 김재권은 'so-called mental'은 physical한 것 위에 supervene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physicalsim에서 볼 때 공동정신 역시 기능적인 것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러나 현상학의 기본 이념에서 부인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무엇이 현상한다고 할 때 그것은 우리의 감각적 지각에 주어짐으로써 현상한다. 이 때 감각적 지각에 주어지지 않는 어떤 본질적인 것을 직관할 수 있다. 하르트만의 공동정신은 이러한 현상학적 고찰의 결과이다. 헤겔의 경우는 사변적 고찰의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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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르트만, [[정신적 존재의 문제]]
2부 객관적 정신
1장 근본현상과 제이론

16절. 개인적 정신에 있어서의 초개인적인 것 (발표자: 신기철)

a. 회고와 결론

개인적 정신의 특성은 그 내면으로부터 규정할 수 없다. 개인적 정신의 특성은 각각의 개인적 정신들과의, 세계와의 관계로부터 얻어질 수 있다. 에토스의 권역에 접근할 경우 개인적 정신에 대한 더욱 본질적 특성을 얻을 수 있다. 이로부터 개별적 인격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선 상호인격적 권역으로부터 얻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개인적 정신이 초개인적 영역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신적 공통성이 개인들을 넘어서서 개인들을 결합하고 부담하여, 그들의 성장과 개별화를 형성하는 이 공통적 정신의 삶을 객관적 정신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 정신의 본질적 규정요소는 개인적 정신 자체에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객관적 정신에서 얻어진다. 객관적 정신은 사람들이 그 안에서 살아가는 까닭에 알아차리지 못하였을 뿐, 엄연히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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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스피노자 윤리설의 핵심은 자아의 외연을 넓혀 세계 전체와 합치시키는 데에 있다. 나=세계이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내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따라서 나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자유롭다. 자연과학의 맥락에서 보면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필연적이다. 그런데 그 세계는 곧 나이다. 이에 나의 자아를 세계와 합치시킴으로써 자유=필연이 성립한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메시지가 있다. 자아의 외연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자아의 외연은 본질적으로 획정되지 않는다. 작아질 수도 있고 커질 수도 있다. 이를 수긍한다면 ‘나’라는 Person을 고정된 알갱이로 보기 어려울 것이다. ‘자아’는 어디에 있는가? 점인가? 덩어리인가? 붙잡기 어렵다. 달이 있으면 달무리가 있듯이 자아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요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이 ‘관계’를 빼고 원자론적 자아를 생각하기는 어렵다. Person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적 삶의 영향권에 있다. 영향들의 총체가 곧 Person이다. 따라서 자아를 획정하기는 어렵지만 전체를 물들이는 흐름은 있을 것이며, 이 흐름은 내 것도 네 것도 아닌 객관적인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개인적 정신에 관하여 논할 때 개인적 정신을 둘러싸는 객관적 정신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 논의는 공허할 것이다.


하르트만은 [[정신적 존재의 문제]] 1부에서 Person을 설명한다. 1부 내용은 philosophische Anthropologie와 같다. 프레스너를 인용하고 셸러의 비무장성, 세계개방성을 언급한다.

Person은 비결정적이며 늘 형성 중에 있다. Peron은 자기형성적이고 자기결정적이다. 따라서 인간은 그 자체로 자유롭다. 필연적 인과관계 속에 완전히 들어가지 않는 것이 있다. 축복인지 저주인지는 모르겠다.

다른 동물들은 그 삶이 원과 같다. 중심이 딱 잡혀 있다. 주변 환경과 그의 삶의 아구가 딱 맞아 떨어진다. 인간은 타원이다. 중심이 왔다 갔다 한다. 이것이 자유로운 영역이다. 인간은 중심에서 벗어나 있는 존재이다(偏心편심, Exzentrizitaet). 딱 정해진 존재가 아니다.

persona는 가면, 탈을 뜻한다. 벗고서 다른 것을 쓸 수 있다. 따라서 인격은 역할role이요 위상이다. 딱 정해진 것이 없다. 동물과 달리 인간은 바람에 날리는 갈대보다도 더 가변적이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각 개인의 정신도 결정되어 있지 않다. 늘 형성 중에 있다. 형성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적어도 인간 정신의 측면에서 보면 형성에 있어 공동정신의 영향이 크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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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정신적 내용의 가분리성

하나의 정신적 개별 존재자가 그의 견해, 의견, 표상, 판단, 편견, 개념 또는 관념이라고 하는 모든 것은 정신적 ‘내용’을 이룬다. 이 내용들은 객관적으로 형성된 형성체로서 정신의 권역 안에서 일종의 객관적인 고유존립 즉 ‘내면적 객관성’을 갖는다. 따라서 정신적 내용은 인격과 분리될 수 있고, 한 인격에서 다른 인격으로 전달될 수도 있으며, 많은 개인들에게 공통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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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정신적 내용이 정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올 수 있다. 정신은 활동한다. 정신이 활동할 때 그 내용은 없을 수 없다. 물론 정신이 “그의 견해, 의견, 표상, 판단, 편견, 개념 또는 관념”만 내용으로 갖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중요하다.

현대 심리철학에서 metal activity 중에 propositional attitude를 보이는 것은 그렇지 않은 것과 다르다. proposition은 ‘어떤 사태에 대한 나의 어떤 정신적 활동을 표현해 놓은 것’이다. 대개 ‘S는 P이다’로 표현된다. 그런데 나의 mental activity 가운데 이러한 명제를 담는 activity가 있고 담지 않는 activity가 있다. 전자에는 판단, 견해, 표상 등이 해당한다. ‘나는 기분이 좋다’, ‘나는 기분이 좋다고 생각 한다’ 등. 인간 정신은 명제적 태도를 취한다. 다시 말해 세계가 나에게 재현represent(Vorstellung 앞에 놓음)된다.

나는 세계 속에서 세계를 산다. 세계 속에 들어가서 산다. 그런데 명제적 태도를 취하는 정신활동을 하는 순간 세계는 밀려난다. 세계는 나에 대하여 있게 된다. ob + jectus, 마주보고 서게 된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여기에서 명제의 내용이 되는 것은 나에게 나타난 세계, 판단의 세계이다. 이것은 나의 정신적 활동 자체로부터 떨어져나갈 수 있다(abloesbar). 이게 안 되면 인간이 아니다. 동물이다. 그런데 이게 떨어져 나가면 네 것, 내 것이 아닌 공동의 것이 된다. 이것이 공동정신의 중요한 내용이 될 수 있다.

내가 글을 읽고 이해하는 과정은 정신적 활동이다. 이해하는 내용이 순전히 내 것인가? 아니다, 공동의 재산이다. 한국어가 세종대왕의 것이 아니요 공동의 것이듯이. 정신적 내용을 빼고 순수한 정신적 활동만 생각할 수 있는가? 정신적 내용을 거의 갖고 있지 않는 이를 얼빠진 놈이라고들 한다. 공동의 재산에 대한 공동 소유가 안 되는 놈, 또라이이다.

교육은 공동의 정신적 자산 중에서 중요한 것을 전수받는 것이다. 그래서 교육은 공교육이어야 한다.

정신 내용으로 형성되는 것은 의식의 내용이다. privat한 의식의 내용이 objektiv한 정신의 내용이 된다.

하르트만은 객관적 정신이 언어 속에 있다고 하였다. 언어가 다른 까닭에 독일적인 얼과 프랑스적인 얼도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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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논리적 형식과 비논리적 주조물. 전달과 가전승성

인격으로부터 내용이 분리될 수 있다는 정신적 생활의 기본특색으로 말미암아 정신적 생활은 단순한 심적 삶과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개념과 판단, 이들의 접속연결은 정신적 내용의 가장 견고한 각인이며, 가장 안정적 전달 방식으로서, 일반적 의사소통 기능인 언어를 통한 모든 전달의 기초가 된다. 표상의 비논리적 주조물은 그 직관성으로 인하여 보다 제한된 객관성을 가지고 있지만, 어느정도의 가분리성과 가전달성을 가지고 있다. 정신적 내용의 표현에 있어 인습적 수단인 언어 외에도 다른 표현 수단 또한 있을 수 있다. 태도, 표정, 몸짓 등의 상징법이 여기에 속한다.

정신적 내용이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이동한다는 것’은 객관적 정신의 근본현상을 이룬다. 마찬가지로 정신적 내용은 역사적으로 세대를 따라 이동할 수도 있다. 내용의 담지자는 바뀌어도 내용은 그대로 존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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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정신적 내용의 표현에 있어 인습적 수단인 언어 외에도 다른 표현 수단 또한 있을 수 있다. 태도, 표정, 몸짓 등의 상징법이 여기에 속한다(단락 1).” articulate가 잘 되는 언어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객관적 정신 속에 있는 것은 논리적 사유의 산물만이 아니다. alogisch논리와 상관없는 것에 이르기까지 정신의 내용은 다층적이다.

정신의 내용은 전달된다. 수평적으로 전달되어 사회, 공동체를 이룬다. 수직적으로 전달되어 역사를 이룬다.

tradieren, 라틴말 그대로 ‘넘겨준다’는 뜻이다. ‘전통Tradition’이 여기에서 나왔다. 이렇게 넘겨줄 수 있는 것의 내용이 logisch한 것일 뿐이겠는가. 지적, 인지적 활동의 대상만이 객관적 정신의 내용이 아니다. 원초적 정감에서 추상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다층적이다. 이를테면 反日 감정도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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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경험과 세계상의 상호주관성

정신적 내용이 객관적 형태를 가지고 있고 전달될 수 있다는 것과 그것의 상호주관성은 서로 합치한다. 상호주관성은 모든 사람을 결합하는 정신의 구조 및 법칙성으로서 처음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져 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로고스가 하나이고 공통한 것임을 지적하였다. 소크라테스는 각자 의견이 다른 개인들 가운데 상호의사소통의 객관적 기초가 있음을 발견하였으며, 플라톤은 상호의사소통의 근저에는 각자의 정신적 내면적 도구가 있음을 주장하였다. 이로부터 개별적 주관의 배후에 있으면서 주관들을 결합하는 보편적인 혹은 초월적인 주관에 관한 학설 또는 신적 지성에 관한 학설로 나아가기도 한다.

사람의 지각, 경험은 각각 다르다고 반론하여도, 표상되고 사유되고 사념된 세계들에서 얼마든지 부분적으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에게는 신체적 및 심적 구조의 동일성이라고 하는 정신외적으로 제약된 상호주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사상, 표상, 의견의 법칙성이 동일성에 기초하고 있는 자율적 정신의 상호 주관성도 있다. 이는 논리적 동일성으로 주관과 주관의 엄밀한 일치를 가능하게 한다.


(하르트만은 나아가 인간에게 유적인 것으로서 범주의 공통성도 언급하지만, 논의를 경험적-인간적 정신의 차원에 한정한다. 마찬가지로 상호주관성에 대해서도 이를 증명하지는 않는다. 인간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간주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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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Intersubjektivity, 훗설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하르트만은 훗설에게서 배웠다고는 하나 방법적으로만 사용할 뿐 현상학을 형이상학적으로 끌어 올리는 데에는 무관심하였다.

상호주관성에 대한 하르트만의 논의에 관하여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객관적 공동정신의 성립이 가능하려면 각 개인이 상호주관성을 가져야 한다, 2)공동정신 속에서야 각 개인이 상호주관성을 가진다. 둘 다 맞다. 상호주관적인 공동성은 철학자들에 의하여 처음 발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없으면 인식의 공유가 불가능하다.

‘Es duenkt mir.’라는 표현이 있다. 직역하면 ‘그런 생각이 나에게 떠오르다’이다. ‘이런 생각이 들다’라는 뜻이다. ‘Wir denken’보다도 ‘Es duenkt in uns’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공동적인 것이 있으려면 제 3의 것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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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이성의 통일과 사유의 부자유

개인적 정신에게 상호주관성이 주어져있다고 하여 개인의 개성이 지양되지는 않는다. 각자는 각자의 의식을 갖는다. 그렇지만 정신은 의식이 아니다. 정신에게는 공통적으로 [논리적 사유의] 법칙과 범주가 주어져 있는 까닭에 정신은 그에 따라서만 자유롭지 않게 사유한다. 사유야 말로 엄밀하게 법칙적이다. 사유는 실재1)에 대해서만 자유롭고 자신의 법칙성에 있어서는 자유롭지 않다.

중세시대의 이단자 처벌은 사유가 자유롭다고 믿은 결과이다. 근대 계몽주의 역시 사유의 자유를 위해 싸운다고 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실은 개인적 신념의 내면적 필연성과 부자유의 승인에 대한 요구였다. 정신은 찬성과 반대를 결단하여 이를 위하여 전력투구하는 것만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을 뿐, 상황의 선택 / 이해 / 가치를 감지하는 것에 있어서는 자유롭지 않다.


1) 하르트만에 있어 ‘실재성’(Realitaet) 개념은 종래의 ‘형상-실재’ 또는 ‘관념-실재’라는 대립적 쌍개념에서의 ‘실재성’과 다르므로 유의해야 한다. 하르트만에서는 현상의 배후로서의 실재, 관념의 근거로서의 실재라는 의미로는 차라리 단지 존재, 또는 즉자 존재(Ansichsein)라는 말이 사용되고, ‘실재’라는 말은 이 즉자 존재 중의 한 영역, 즉 시간적 변화 속에 들어오는 개체적 ․ 구체적 존재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즉자 존재 중의 다른 한 영역은 초시간적 ․ 보편적 성격을 본성으로 하는 이법적(理法的, ideal) 존재가 차지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하기락 님은 종래의 ‘실사성’ 개념과 구분하기 위하여 하르트만에서의 'Realitaet'를 실사성(實事性)이라고 번역하고 'Idealitaet'는 이법성(理法性)이라고 번역하는데, 나는 이 중 우리말로 어색한 조어인 앞의 것은 일단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실질성’(實質性)이라는 말을 염두에 두고 있다. (N. 하르트만, 손동현 역, [[존재론의 새로운 길]], 서광사, 역주 1, 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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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하르트만도 용어를 섞어 쓰기도 한다. ‘Bewusst의식’는 ‘알고 있음’을 뜻한다. 하르트만이 ‘Bewusst’를 네 가지 존재 층위(Geist / Seele / Leben / Materie)에 적용한 것은 잘못한 것이다. 여기에서 Bewusst는 심성Seele 정도로 보기 바란다. 인간은 심성적 존재로서는 분리만 할 뿐 propositional attitude를 갖지 않는다. 오로지 사적인 느낌만을 갖는다. Intersubjektivitaet이 없다.

“정신적 존재에 있어서의 상호주관성의 현상들은 그것이 모든 개성을 지양해 버린다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 현상들은 예를 들자면 의식세계들 간의 분리를 결코 지양해 버리지 않고, 다만 기본적인 공통성에 의해서 의식세계들 간에 다리를 놓을 뿐이다. 각인은 각자의 의식을 갖고 있다. 하지만 정신은 의식이 아니다. 정신은 퍼진다. 의식은 분리하고, 정신은 결합한다(국역판 249쪽).”

이를테면 아프다는 pain에 대한 ‘의식’ 자체는 공유할 수 없다. 사적인 것이다. 그러나 아픔으로 인한 ‘정신’적 태도는 공유할 수 있다. 따라서 정신은 개개인을 결합시키고 의식, 심성은 개개인을 떼어 놓는다.


하르트만에 따르면 인간은 사유의 과정 자체를 선택할 수 없다. 인간에게 자유로운 것은 사유를 토대로 한 결단, 사유를 토대로 한 태도 취하기이다. 사유 자체는 자유롭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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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절을 예비적 고찰이었다. 17절에서 하르트만은 철학사에서 통념적으로 쓰인 개념들에서 불투명한 부분을 분명히 한다. 특히 헤겔 철학에 대하여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자고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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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절. 개념의 천명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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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존재론적 관점에서 보면 정신적 존재의 문제에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은 공동체의 문제이다. 공동체는 존재론적 실체성을 가지고 있는가? 개인이 실체성을 갖고 있다는 점은 다 안다. 나도 개인, 너도 개인이니까. 공동체는 어떨까? 개인은 아니면서도 개인으로 구성된 공동체의 존재론적 지반은 어떻게 정립될 수 있을까?

헤겔에 따르면 개개인은 공동정신, 더 나아가 시대정신, 절대정신이 구현되기 위한 하나의 사례들이다. 헤겔 철학 전체로 보면 개인은 공동체보다 우위에 있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헤겔 철학은 사변적이고 허무맹랑하다고 매도할 수만은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전체가 허구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변철학이지만 헤겔 철학에 논리가 없는 것이 아니다. 하르트만은 헤겔이 객관적 정신을 발견하였으며 역사의 주체를 객관적 정신에 돌린 공적을 높이 산다.

역사의 주체는 누구인가? 인물인가? 영웅인가? 카이사르인가? 한 개인이 아무리 훌륭해도 당시 상황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카이사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그 역할을 수행했을지 모를 일이다.

어쨌든 객관적 정신을 구현하는 자는 개인이다. 객관적 정신용 구현체가 따로 있지 않다. 객관적 정신을 개인이 구현하려니 버겁다. 이에 역사는 비극이 될 수밖에 없다는 존재론적 결핍이 있다. 비극을 얼마나 줄이느냐가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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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정신과학의 테마

[헤겔에서처럼] 정신을 형이상학적으로 다룸으로써 [현상에서의] 대상으로서 파악할 수 없다면, 객관적 본질특징에 관한 모든 논의는 헛된 일이다. 초개인적인 객관적 정신을 하나의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으로서 직접 알 수는 없으나, 객관적 정신의 존재방식을 이해하면 그 실존을 증명할 수 있다.

개인적 정신인 정신적 개체의 경우 직접적으로 주어졌다는 점에서 명료해 보이지만, 그것의 본질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이와 반대로 객관적 정신 자체는 불명료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현상방식을 파악하면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늘 관계하는 것임을, 따라서 명료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객관적 정신에 관한 고찰은 두 가지 차원 - 정태적 / 구조적 차원과 시간적 / 역동적 차원 -에서 이루어진다는 이점을 갖는다. 이에 객관적 정신에 대한 고찰은 현상을 고정시킨 채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객관적 정신은 [개인적 정신과 같이] 인격, 작용, 의식, 자기의식 등이 아니다. 전적으로 형성된 것, 주조된 것, 내용적으로 파악 가능한 형태이며, 역사적 정신으로서는 이러한 것들의 변천이고 생성과정이다.

아무런 학도 존재하지 않는 개인적 정신의 경우와 달리, 객관적 정신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적 탐구가 이루어진다. 언어학, 문예학, 예술학, 제문화과학, 역사과학 등 다양한 분과들이 객관적 정신을 대상으로 삼는다. 개인들의 특색과 운명은 언제나 전체로서의 역사적 정신의 시대적 계기를 배경으로 하여 이해된다. 개인의 특색과 운명이 과학의 대상으로 삼아지는 것은 그 인격이 초개인적-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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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하르트만은 헤겔이 정신을 형이상학적으로 다룬다고 지적한다(단락 1). ‘형이상학적으로 다룬다’는 것은 하르트만에 있어 나쁜 뜻이다. 현상에 주어지지 않으면 허구이다. 그런데 여기서 ‘현상’은 감각적 지각에 주어지는 현상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를테면 개인적, 공동적, 객체화된 정신이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 하르트만적 의미의 ‘현상’이라고 하겠다. 이와 달리 형이상학적인 것은 초 경험적인 것을 뜻한다.

“객관적 정신에 관한 고찰은 두 가지 차원 - 정태적 / 구조적 차원과 시간적 / 역동적 차원 -에서 이루어진다(단락 3)”. 정태적 / 구조적 차원에는 사회철학, 국가철학, 정치철학이 해당한다. 시간적 / 역동적 차원에는 역사철학이 해당한다.

“아무런 학도 존재하지 않는 개인적 정신의 경우와 달리, 객관적 정신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적 탐구가 이루어진다(단락 4).” 독일에는 'Sprachwissenschaften언어과학들', 심지어는 'Geschichtswissenschaften역사과학들'도 있다. 학문적 탐구는 대체로 전칭판단이다. 개인적 정신의 영역에서는 개인 회고록을 쓸 수는 있어도 학적 탐구를 할 수 없다. 심리학이 손동현 개인의 심리에 대하여 탐구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T. S. Eliot이라는 개인에 관한 연구도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이 경우 Eliot 私人에 대하여 탐구하는 것이 아니다. Eliot 작품에 반영된 시대정신, 객관적 정신을 다루기 때문에 Eliot에 관한 연구가 가능하다. 문학 평론하는 이들은 자신이 하는 것이 학인지 학이 아닌지 구별을 못한다. 감상문을 써 놓고 논문이라고 우긴다. 감상문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카테고리가 다르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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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시대정신과 민족정신

객관적 정신의 사례로 시대정신과 민족정신을 들 수 있다. 사람들은 전혀 무리 없이 ‘르네상스의 정신’, ‘키케로의 로마 정신’ 등을 이야기한다. 여기에는 이 ‘정신’의 어떤 상이 있다. 마찬가지로 외국에 간다면 사람들은 자신과는 다른 ‘민족 정신’을 경험할 수 있다. 이 ‘정신’을 사물로써 가리킬 수는 없어도 일상경험으로써 명백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이 객관적 정신은 각자의 특수성을 지닌 개인적 정신과는 다른 전체로서의 어떤 것이다.

시대정신과 민족정신은 또한 각각 두 가지 차원 - 정태적 / 구조적 차원과 시간적 / 역동적 차원 -을 갖는다. 이들은 차원이 다를 뿐 서로 겹쳐진다. 시대정신은 동시대성에 있어서 여러 민족적 특수성들로 분화하는 것이다. 이 ‘분화’에 있어서 원리적 한계는 없다. 하나의 도시, 자치단체, 직업적 계급, 노동자 단체 등은 각각 일정하게 형성된 공동정신을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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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Geist는 정신이지만 Geister는 귀신을 뜻한다. 현대 심리철학에서 정신은 허구이다. 이해가 간다. 손에 잡히지 않으니까. 감각적으로 지각되지 않으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정신을 경험한다. 그렇다면 그 정신은 무엇인가. 정신은 감각적 지각으로 분석되지 않고, 이성적 사유로 지각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나의 삶에 영향을 준다. 그래서 모호하다.


Erfahren / Erleben / Betroffen / Macht

‘Macht힘’으로 무언가를 내가 체험했다. 그것을 내 주관적인 입장에서 betroffen으로 표현한다. ‘Betroffen체험’은 하르트만의 용어이다. Grundlegung에서 많이 사용한다. 하이데거 식으로 보면 Dasein이다.

betreffen은 be(강렬해진, 실체적인 것이 ㄷㅘㅁ) + treffen(만나다)이다. 도둑질하다가 순경을 딱 만나는 것, 덜미 잡히는 것을 뜻한다.

Erfahren경험은 Er(내 것으로 만들어 버림) + fahren(가다)이다.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여정을 내가 갖는다.

‘be-’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에 붙이는 접두사이다. ‘er-’는 ‘내 것으로 만들어 버림’을 뜻하는 접두사로 ‘be-’보다 더 강한 의미를 갖는다.

‘Erfahre경험 Erleben체험’은 ‘힘에 맞닥뜨리는 것’이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나에게 강렬하게 영향을 준다. 이는 현상학적 기술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훗설은 ‘지평’ 개념을 제시하였다. 달무리처럼 주변이 같이 보이는 것이다. 주변으로 갈수록 점점 흐려진다. 환원적 분석으로는 잡히지 않는다. 환원적 분석을 뛰어 넘는 것이 현상학적 기술의 방법이다. 실증과학의 약점을 인식하는 데에 현상학적 기술의 힘이 있다.

‘체험 한다’, ‘힘과 맞닥뜨린다’는 식으로 볼 때 객관적 정신, 공동정신이 ‘있다’. 현상학적 기술 대상이 된다.

2002년의 붉은 악마에 대하여 ‘뭉클했다’는 반응은 사적인 체험이다. 그것 말고 그들이 체험한 어떤 것, 하나의 힘이 있고 그들이 그 힘에 맞닥뜨리는 것이다. 그래서 ‘betroffen’을 ‘사로잡히다’로 번역한다.


칸트에서 의식일반은 사유이다. ‘Bewusstsein의식’은 Be + wissen + sein, 즉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피히테가 이 단어를 가지고 장난 쳤다. ‘ein이 wissen에 서 있다’고 하였다. Ich를 주체로 정립한 후, Ich가 존재를 설정한다고까지 보았다. Sein은 Bewusstsein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헤겔이 이를 이어받았다. 주관적 ich를 절대화하였다. 이에 ‘절대자아가 존재를 정립한다’와 ‘신이 세계를 창조한다’를 동일한 의미로 간주하였다.

헤겔은 민족정신들이 시대정신을 전승받고 전수한다고 주장하였다. 하르트만은 이를 그대로 수긍한다.

칸트적 의식일반은 초시간적이다. 이와 달리 객관적 정신은 역사, 사회, 시대성을 가진다. 이 객관적 정신을 다 모아서 절대적 정신이라고 부른 자가 헤겔이다. 그러나 하르트만은 이 절대적 정신이 나에게 경험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객관적 정신의 시대적 지속성, 객관적 정신의 삶이 갖는 시간적 지속성과 지역적 광범성은 상대적이다.

객관적 정신에도 층위가 있다. 2008년 한국의 얼이라는 것이 있다고 할 때 이 얼은 성대 / 고대 /이대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 성대 안에서도 철학과, 경영학과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

하르트만에 따르면 객관적 정신은 획정된 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 상대적,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헤겔식의 ‘절대적 정신’으로는 곤란하다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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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공동체, 집합체 및 공동정신

공동정신은 공동체나 집합체가 아니다. 그러나 공동정신은 집합체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이에 어떻게 공동정신이 모든 동시대인에게 있어 하나의 형성체이고, 개체들의 공동체와는 다른 차원의 전체성인지가 밝혀져야 한다.

1. 공동정신은 기계적-발생적 견해로 파악되어서는 안 된다. [자연상태론처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공동정신 이전에 존재하는 개별인격을 발견할 수는 없다. 공동정신은 이미 일정하게 형성되어 있고, 사람은 이미 성립해 있는 타당성, 습속, 언어 등을 ‘넘겨받는다’.

2. 공동정신은 개체들의 총화가 아니다.

3. 다세포유기체가 세포들의 총화가 아니듯이 공동정신도 개인적 정신들의 총화가 아니다. 그런데 다세포유기체와 달리 공동체의 개인들이 증가하고 감소함에 따라 공동정신이 성장하거나 축소되지 않는다.

4. 모든 객관적 정신은 그 자체에 있어서 하나의 잡다한 다양성이다. 공동정신은 개체들의 집합이 아니요, 정신적 형식들, 내용들 및 타당한 것들의 집합이다. 따라서 공동정신의 다양성은 개인들의 다양성이 아니라 그들의 동질성이다.

5. 한 개별인격조차도 공동정신의 대표일 수 있다. 한 개별인격은 공동정신을 완전하게 포괄하지 못하고 일면적으로만 포괄하기 마련이지만, 공동정신은 그 개별인격과 함께 있을 수 있다. 이에 한 시대정신의 특징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그러한 인물을 찾아내려 할 수 있다.


(헤겔 역사철학에서의 인간 자유의 실현이라는 역사의 이념을 자신의 목적으로 받아들여 이를 완수하고 죽음으로 마무리하는 ‘세계사적 개인’과는 어떻게 다른가? 공동정신의 대표자가 포괄하는 공동정신은 공동체 / 시대마다 각각 다를 수 있을까? 나아가 공동정신의 내용 또한 [이를테면 인간 자유의 실현처럼] 일관성을, 적어도 일관된 방향이라도 가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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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c. 공동체, 집합체 및 공동정신Gemeinschaft, Kollektivitaet, und Gemeingeist” - ‘c. 공동체, 집단 및 공동정신’으로 고칠 것.

공동체Gemeinschaft와 집단Kollektivitaet 간에는 공동정신Gemeingeist이 아니라는 공통점은 있다. 그러나 집단은 그야말로 집합인 까닭에 공동체일 수 없다. 집단에 공동정신이 들어가야 공동체가 될 수 있다. 이 점에 착안하여 퇴니스는 Gemeinschaft와 Gesellschaft를 구별하였다. Gesellschaft에는 rule만 있으면 된다. 집단에 가까운 개념이다.


1. 공동정신은 그 출발 / 종착점을 알 수 없다. 평면적으로 보면 개개인이 모여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러나 공동체에서 개인이 태어났다. 공동체에서 태어남으로써 비로소 인격이 된다.
“타당성” - 도덕적, 관습적, 법적 타당성에 대한 관행을 뜻한다.

3. 다세포유기체와 달리 공동정신에는 그 나름의 실체성의 방식이 있다.

4. 한국인 개개인의 다양성이 아니라 오히려 한국인들의 동질성이 있다. 이를테면 한국정신과 미국정신의 차이는 각 정신의 동질성의 차이에 있다.

5. 한 개인의 정신에는 용량이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다. 객관적 정신이 많이 담겨 있으면 용량이 크고 그렇지 않으면 작다. 세계사적 개인은 용량이 매우 큰 개인에 해당한다. 객관적 정신의 핵심을 다 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시대의 시대정신, 민족정신을 대표할 수 있다. 제일 나은 sample인 셈이다. 세계사적 개인은 그러나 私人으로서는 형편없기도 하다. 카이사르는 바람둥이에 빚쟁이이기까지 하였다.

공동정신에는 오류 가능성이 있다. 인간이 이미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개인 보다는 객관적 정신의 오류 가능성이 덜 하다.

“공동정신의 내용 또한 [이를테면 인간 자유의 실현처럼] 일관성을, 적어도 일관된 방향이라도 가질 수 있을까?” -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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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살아 있는 공동정신과 추상화된 유형

객관적 정신은 단순한 추상적 일반자나 무시간적 본질성이 아니다. 객관적 정신은 역사를 가지며, 일정 시간 안에서 그 존재를 갖는다. 따라서 객관적 정신은 등장하고, 전개되고, 다시 사라진다. 이는 민족정신, 시대정신에 모두 해당되며, 가장 하찮고 덧없는 형태의 집단정신에 이르기까지 모든 동급의 공동정신에게 해당된다.

살아 있는 문화와 죽은 문화, 마찬가지로 언어, 도덕, 법 등을 살펴볼 때 공동정신이 역사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객관적 정신은 모든 형식들과 부분영역들에 있어서 역사적 실재성을 가진다. 제한된 시간 속에 존재하며, 이 제한된 시간에 그의 실존이 얽매여 있다. 모든 공동정신은 실재적 세계에 속한다. 절대로 실재적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실재적 세계에 대해 초월적인 것인 것처럼  실재적 세계 속에 나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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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실재적” - “실질적”으로 고칠 것. ‘실질적real’인 것은 ‘시간 속에 들어오는 것’을 뜻한다.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법적ideal’인 것이다.

real - irreal 구도로 볼 때 real은 ‘실재적’, irreal은 ‘비실재적, 날조, 허구적인’ 것으로 번역한다. 이는 하르트만의 맥락에서 Ansich이다. Ansich는 ‘ideal이법적’인 것과 ‘real실질적’인 것으로 나뉜다. 이법적인 것에는 수, 논리, 가치, 본질이 해당하고, 실질적인 것은 시간 속에 들어오는 것으로서 물질, 생명, 심성, 정신이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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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객관적 정신과 객체화된 정신

        객관적 정신은 [공통적인 것의 통일성을 결여한] 개인들의 총화도 아니고, [생동성과 실재성을 결여한] 개인들에게 공통된 본질특징의 총괄도 아니다. 객체화된 정신은 정신이 창조한 산물이다.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 여기에 속한다. 도구, 가구, 무기를 비롯하여 조각작품, 시, 냉정하게 기재된 보고 등이다. 이들은 개인적 정신이건, 공동정신이건 간에 살아있는 정신이 ‘자기를 객체화’한 것으로 직접적으로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반면에 이들은 정신보다 더 오래 살아남는다. 그래서 각 민족과 각 시대에 그 민족의 정신으로서의 특정한 ‘객체화된 정신’이 살고 있다.


(객체화된 정신을 만드는 것은 개인적 정신인가 공동정신인가? 객체화된 정신이라는 구체적 대상을 ‘누군가’가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일단은 개인적 정신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개인적 정신은 공동정신의 일면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결국에는 공동정신의 산물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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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실재성” - ‘실질성’으로 고칠 것.

살아있는 정신은 네 가지 층위(Geist / Seele / Leben / Materie)를 모두 가지고 있다. 객체화된 정신에는 중간 층 2 개(Seele / Leben)가 없다. ‘半 죽은 정신’이다. 반 죽으면 더 오래 살아남는다. 이것이 역사를 가능하게 하는 토대이다. 객체화된 정신은 모두 문화재이다. 일단 객체화된 정신은 ‘반죽은 정신’이라는 것만 알아두자.

“(객체화된 정신을 만드는 것은 개인적 정신인가 공동정신인가? 객체화된 정신이라는 구체적 대상을 ‘누군가’가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일단은 개인적 정신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개인적 정신은 공동정신의 일면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결국에는 공동정신의 산물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일까?)” - 맞다. 혼자 묻고 혼자 대답 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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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공부한 내용까지 도입부였다. 앞으로 재미있다.

하르트만은 독일 관념철학의 추상성을 많이 털어내고, 경험적, 현실적 요소를 가져온다. 그렇지만 여전히 헤겔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하르트만은 이 문제의식을 현대식으로 각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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