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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dieBildung.net</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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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함께하는뻘짓속에커져가는자기반성</description>
	<pubDate>Sun, 04 Jan 2009 16:13:39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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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철학적인간학] 마지막</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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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04 Jan 2009 16:08:55 +0000</pubDate>
		<dc:creator>darkforce</dc:creator>
		
	<category>anthropologie</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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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목표를 무엇으로 설정하느냐에 따라 문화권의 향방이 바뀐다. 목표가 어디로부터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궁극적 목적이 없다는 주장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 목적이 있음을 부정하는 정신적 사유는 있을 수 없다.
여러 학자들을 살펴보았다. 다 불완전하다. 다 편파적이다. 이런 입장들을 보며 정답 없는 문제지만 고민해보자는 것이 이 강좌의 목표였다.
[필기전문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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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nt:encoded><![CDATA[<p>목표를 무엇으로 설정하느냐에 따라 문화권의 향방이 바뀐다. 목표가 어디로부터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궁극적 목적이 없다는 주장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 목적이 있음을 부정하는 정신적 사유는 있을 수 없다.</p>
<p>여러 학자들을 살펴보았다. 다 불완전하다. 다 편파적이다. 이런 입장들을 보며 정답 없는 문제지만 고민해보자는 것이 이 강좌의 목표였다.</p>
<p>[<a href="http://diebildung.net/bbs/view.php?id=scriptorium&#038;page=1&#038;sn1=&#038;divpage=1&#038;sn=off&#038;ss=on&#038;sc=on&#038;select_arrange=headnum&#038;desc=asc&#038;no=388">필기전문읽기</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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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철학적인간학] 15주차 -下</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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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04 Jan 2009 15:55:32 +0000</pubDate>
		<dc:creator>darkforce</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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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인간 존재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결국 제자리로 돌아왔다. 우리는 신체를 무시할 수 없다. 신체를 활용해야 한다. 그렇다고 정신을 무시할 수 없다. 정신은 신체에 의존하는 만큼 자유로울 수 있다. 정신의 독자성도, 신체에의 의존성도 인정해야 한다. 학기 처음과 같은 이야기이다. 같은 이야기에 도달하였지만 우리는 먼 길을 돌아 보았다. 앞으로는 단순히 칸트가 옳으니 그르니 이야기하지 말기 바란다.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인간 존재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결국 제자리로 돌아왔다. 우리는 신체를 무시할 수 없다. 신체를 활용해야 한다. 그렇다고 정신을 무시할 수 없다. 정신은 신체에 의존하는 만큼 자유로울 수 있다. 정신의 독자성도, 신체에의 의존성도 인정해야 한다. 학기 처음과 같은 이야기이다. 같은 이야기에 도달하였지만 우리는 먼 길을 돌아 보았다. 앞으로는 단순히 칸트가 옳으니 그르니 이야기하지 말기 바란다. 그것은 범주 착오의 오류이다.</p>
<p>[<a href="http://diebildung.net/bbs/view.php?id=scriptorium&#038;page=1&#038;sn1=&#038;divpage=1&#038;sn=off&#038;ss=on&#038;sc=on&#038;select_arrange=headnum&#038;desc=asc&#038;no=387">필기전문읽기</a>]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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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철학적인간학] 11주차 -下</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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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04 Jan 2009 15:02:56 +0000</pubDate>
		<dc:creator>darkforce</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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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소설에는 1인칭 소설도 있고 3인칭 소설도 있다. 1인칭으로 서술하는 과학은 없다. 과학 이론은 그 이론을 만든, 그 이론을 접하는 사람의 마음, 태도와는 무관하다. 과학 이론의 내용은 주관을 배제한다. 이를 과학의 객관적 타당성이라고 한다. 철학에는 1인칭도 있다. 하이데거를 비롯한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그들이다. 헤겔이 진리는 전체라고 주장하였을 때, 진리는 주체인 내가 받아들여야 진리라면서 헤겔을 비판한 사람이 있었다.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소설에는 1인칭 소설도 있고 3인칭 소설도 있다. 1인칭으로 서술하는 과학은 없다. 과학 이론은 그 이론을 만든, 그 이론을 접하는 사람의 마음, 태도와는 무관하다. 과학 이론의 내용은 주관을 배제한다. 이를 과학의 객관적 타당성이라고 한다. 철학에는 1인칭도 있다. 하이데거를 비롯한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그들이다. 헤겔이 진리는 전체라고 주장하였을 때, 진리는 주체인 내가 받아들여야 진리라면서 헤겔을 비판한 사람이 있었다. 키에르케고르이다. 이러한 철학자들이 1인칭적 접근에 해당한다. 객관적 타당성을 추구하는 과학적 방법에 입각하여 3인칭적 접근을 추구하는 심리철학에 비하면 매우 다른 논의이다.</p>
<p>[<a href="http://diebildung.net/bbs/view.php?id=scriptorium&#038;page=2&#038;sn1=&#038;divpage=1&#038;sn=off&#038;ss=on&#038;sc=on&#038;select_arrange=headnum&#038;desc=asc&#038;no=368">필기전문읽기</a>]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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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철학적인간학] 11주차 -上</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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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04 Jan 2009 14:50:59 +0000</pubDate>
		<dc:creator>darkforce</dc:creator>
		
	<category>anthropologie</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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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심적인 것은 통 손에 잡히지 않는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이 슬프다고 하여 가슴을 칼로 그어봐라, 피만 나온다.
내가 희망하는 것, 욕구하는 것 등은 모두 무엇인가를 지향한다. 그런데 감각적인 것, 일테면 내가 아프다는 것은 아무 것도 지향하지 않는다. 즉 심적인 것에는 지향적인 것도 있고 지향적이지 않은 것도 있다. 현대 심리철학은 감각적이거나 질적인 상태와 지향적 상태를 포괄하는 공통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심적인 것은 통 손에 잡히지 않는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이 슬프다고 하여 가슴을 칼로 그어봐라, 피만 나온다.</p>
<p>내가 희망하는 것, 욕구하는 것 등은 모두 무엇인가를 지향한다. 그런데 감각적인 것, 일테면 내가 아프다는 것은 아무 것도 지향하지 않는다. 즉 심적인 것에는 지향적인 것도 있고 지향적이지 않은 것도 있다. 현대 심리철학은 감각적이거나 질적인 상태와 지향적 상태를 포괄하는 공통 속성을 규명하지 못한다. 독일철학 전통에서는 지향적 태도를 갖는 심적인 것을 &#8216;정신적인 것&#8217;으로 규정하여 독자적인 영역으로 분류한다. 이에 정신의 활동을 다루는 학문을 인문학, 정신과학이라고 한다.</p>
<p>[<a href="http://diebildung.net/bbs/view.php?id=scriptorium&#038;page=2&#038;sn1=&#038;divpage=1&#038;sn=off&#038;ss=on&#038;sc=on&#038;select_arrange=headnum&#038;desc=asc&#038;no=367">필기전문읽기</a>]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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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철학적인간학] 10주차 -下</title>
		<link>http://diebildung.net/archives/204</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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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03 Jan 2009 16:25:29 +0000</pubDate>
		<dc:creator>darkforce</dc:creator>
		
	<category>anthropologie</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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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고통이라는 속성이, 믿음이라는 속성이 아무개의 어떤 시점의 마음의 상태에서 예화되고, 또 다른 누군가의 어떤 시점에서 예화된다. 막스 셸러의 &#8216;정신의 생명화&#8217;와 같은 논의가 막연한 데에 비해 예화에 관한 논의는 명확하다. 과학적 탐구의 방법에 가깝다. 이렇게 복합적 속성이 구체화되는 것을 김재권을 예화라고 불렀다. 그때그때 구체화되는 장소, 현장이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필기전문읽기]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고통이라는 속성이, 믿음이라는 속성이 아무개의 어떤 시점의 마음의 상태에서 예화되고, 또 다른 누군가의 어떤 시점에서 예화된다. 막스 셸러의 &#8216;정신의 생명화&#8217;와 같은 논의가 막연한 데에 비해 예화에 관한 논의는 명확하다. 과학적 탐구의 방법에 가깝다. 이렇게 복합적 속성이 구체화되는 것을 김재권을 예화라고 불렀다. 그때그때 구체화되는 장소, 현장이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이다.</p>
<p>[<a href="http://diebildung.net/bbs/view.php?id=scriptorium&#038;page=2&#038;sn1=&#038;divpage=1&#038;sn=off&#038;ss=on&#038;sc=on&#038;select_arrange=headnum&#038;desc=asc&#038;no=366">필기전문읽기</a>]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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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예술철학]] 서론 강독 40주차 - 23.28~24.14</title>
		<link>http://diebildung.net/archives/203</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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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0 Dec 2008 15:54:32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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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헤겔에 따르면 &#8216;내용과 형식의 완전한 합치&#8217;라는 Ideal이념상을 추구Erstreben하는 것이 상징적 예술이고, 이념상을 성취Erreichen한 것이 고전적 예술이며, 초월Ueberschreiten한 것이 낭만적 예술이다. 따라서 낭만적 예술 형식은 예술의 종말이다. 낭만적 예술 형식 다음의 것은 예술이 아니라 다음 단계인 종교이다. 예술의 궁극목적이 예술 아닌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변증법적 전개 과정이다. 변증법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맹아를 완전히 실현하는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헤겔에 따르면 &#8216;내용과 형식의 완전한 합치&#8217;라는 Ideal이념상을 추구Erstreben하는 것이 상징적 예술이고, 이념상을 성취Erreichen한 것이 고전적 예술이며, 초월Ueberschreiten한 것이 낭만적 예술이다. 따라서 낭만적 예술 형식은 예술의 종말이다. 낭만적 예술 형식 다음의 것은 예술이 아니라 다음 단계인 종교이다. 예술의 궁극목적이 예술 아닌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변증법적 전개 과정이다. 변증법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맹아를 완전히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가진다. 실현 후 원점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벗어나 질적으로 전혀 다른 영역으로 넘어간다. 자기 안의 맹아를 완전히 실현하여 자기를 부정하고 넘어가는 바 이를 &#8216;자기내초출自己內超出&#8217;이라고 한다.</p>
<p>A와 -A는 동일한 사태Sache의 두 측면이다. 양자를 자신의 계기로 가지는 전체에서 보면, A와 -A는 서로 대립,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 입각하여 정치철학 맥락에서 보면 변증법은 모순, 대립하는 것을 모두 인정하고 가자는 지극히 보수적인 태도가 된다. 이와 달리 [[정신현상학]]의 도정을 생각해보라. 감각적 확실성에서 출발하여 절대적 지까지 간다. 더 나은 것, 새로운 것이 등장하는 과정이다. 이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완성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로부터 더 나은 뭔가 새로운 것이 등장할 수 있는 싹이 이 안에 있다는 논의가 가능하다. 이때 변증법은 혁명의 방법론이 될 수 있다. 변증법에서는 이 두가지가 모두 이야기될 수 있다. 어떤 측면을 변증법의 진수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일 것이냐에 따라 썩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겠다.</p>
<p>[<a href="http://diebildung.net/bbs/view.php?id=scriptorium&#038;page=1&#038;sn1=&#038;divpage=1&#038;sn=off&#038;ss=on&#038;sc=on&#038;select_arrange=headnum&#038;desc=asc&#038;no=385">필기전문읽기</a>]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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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철학적인간학] 15주차 -上</title>
		<link>http://diebildung.net/archives/202</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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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08 Dec 2008 17:05:51 +0000</pubDate>
		<dc:creator>darkforce</dc:creator>
		
	<category>anthropologie</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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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베르그송의 인간관을 파악하는 초점은 지속과 자유이다. &#8216;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인가, 자연법칙에 지배되는 존재인가&#8217;의 문제를 베르그송은 지속의 관점에서 인간의 자유를 논함으로써 규명한다.
[필기전문읽기]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베르그송의 인간관을 파악하는 초점은 지속과 자유이다. &#8216;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인가, 자연법칙에 지배되는 존재인가&#8217;의 문제를 베르그송은 지속의 관점에서 인간의 자유를 논함으로써 규명한다.</p>
<p>[<a href="http://diebildung.net/bbs/view.php?id=scriptorium&#038;page=1&#038;sn1=&#038;divpage=1&#038;sn=off&#038;ss=on&#038;sc=on&#038;select_arrange=headnum&#038;desc=asc&#038;no=384">필기전문읽기</a>]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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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memo</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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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08 Dec 2008 03:10:03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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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RP: 김희원. - 16,000
PZ: 김희원, 박주영. - 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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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nt:encoded><![CDATA[<p>RP: 김희원. - 16,000<br />
PZ: 김희원, 박주영. - 5,000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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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예술철학]] 서론 강독 38주차 - 22.1~23.16</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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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05 Dec 2008 11:33:25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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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정신현상학]]에 따르면 진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주체로서도 사유되어야 한다. 또한 헤겔에서 진리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이슬람교와 유태교는 신을 추상적으로만 파악한다. 내가 신을 주체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신을 단순한 고정된 실체로서만이 아니라 주체로서도 파악하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헤겔은 기독교가 인간 주체성Subjektivitaet의 본격적 시작이라고 파악한다. 예수가 저 하늘에만 머물러 있는 신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살았던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정신현상학]]에 따르면 진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주체로서도 사유되어야 한다. 또한 헤겔에서 진리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이슬람교와 유태교는 신을 추상적으로만 파악한다. 내가 신을 주체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신을 단순한 고정된 실체로서만이 아니라 주체로서도 파악하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헤겔은 기독교가 인간 주체성Subjektivitaet의 본격적 시작이라고 파악한다. 예수가 저 하늘에만 머물러 있는 신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살았던 구체적인 신이기 때문이다. 이에 기독교의 신은 단순한 일자가 아니요 우리의 삶으로 들어온 구체적 일자이다.</p>
<p>[<a href="http://diebildung.net/bbs/view.php?id=scriptorium&#038;page=1&#038;sn1=&#038;divpage=1&#038;sn=off&#038;ss=on&#038;sc=on&#038;select_arrange=headnum&#038;desc=asc&#038;no=381">필기전문읽기</a>]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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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철학적인간학] 14주차 -下 (신원규 필사)</title>
		<link>http://diebildung.net/archives/199</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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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04 Dec 2008 11:55:42 +0000</pubDate>
		<dc:creator>darkforce</dc:creator>
		
	<category>anthropologie</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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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베르그송은 헤라클레이토스처럼 세계를 흐르는 것으로 보고 이를 지속(duration)으로 표현한다. 물체도 생각도 모두 흐르는 것이다. 다만 물체는 느리게 흘러 굳어 있는 듯한 것이고, 의식 가운데 순수한 의식인 마음은 빨리 흐르는 것이다. 즉 흐름 연속성에서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우리의 의식 활동 중에도 거의 흐르지 않는 매일의 의식이 있고, 날아가듯 흐르는 순수 의식이 있다. 이러한 것이 세계의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베르그송은 헤라클레이토스처럼 세계를 흐르는 것으로 보고 이를 지속(duration)으로 표현한다. 물체도 생각도 모두 흐르는 것이다. 다만 물체는 느리게 흘러 굳어 있는 듯한 것이고, 의식 가운데 순수한 의식인 마음은 빨리 흐르는 것이다. 즉 흐름 연속성에서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우리의 의식 활동 중에도 거의 흐르지 않는 매일의 의식이 있고, 날아가듯 흐르는 순수 의식이 있다. 이러한 것이 세계의 참모습이다.</p>
<p>[<a href="http://diebildung.net/bbs/view.php?id=scriptorium&#038;page=1&#038;sn1=&#038;divpage=1&#038;sn=off&#038;ss=on&#038;sc=on&#038;select_arrange=headnum&#038;desc=asc&#038;no=383">필기전문읽기</a>]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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