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인간학] 13주차 -下 (신원규 필사)
도덕법칙이란 자연적 현상에서 찾을 수 없다. 도덕적 선함의 근거는 인간 이성이 스스로에게 명령하는 당위의 규칙에 따랐는가에 있다. 예지계와 현상계의 두 세계 속에서 도덕적 정당성 여부는 예지계에만 관계한다. 그리고 도덕법칙은 발견해야 하는 것으로, 이를 발견하는 것이 실천이성이다. 따라서 우리는 순수한 실천이성에 따라 우리 자신을 도덕법칙 아래에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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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구입 도서
2008.12.18. [동아서원] (160,000)
Daniel Garber & Steven Nadler edit, [[Oxford Studies in Early Modern Philosophy I~III]], Clarendon Press. Oxford. Tamar Szabo Gendler & John Hawthorne edit, [[Oxford Studies in Epistemology I~II]], Clarendon Press. Oxford. Riss Shafer-Landau edit, [[Oxford Studies in Metaethics I~III]], Clarendon Press. Oxford.
2008.12.10. 제본
Roger L. Huard, [[Plato’s Political Philosophy - The Cave]], Algora. (6,000)
2008.12.08. [동아서원]
Dean W. Zimmerman edit, [[Oxford Studies in Metaphysics I~IV]], Oxford. (80,000)
2008.12.04. [동아서원]
Ken Gelder edit, [[Subcultures - Critical Concepts in Media and Cultural Studies I~IV]], Routledge. (80,000)
[[예술철학]] 서론 강독 39주차 - 23.17~27
예술 작품이 예술 작품으로서 탁월하려면 고전적 예술 작품의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 그렇다고 그것이 진리를 충분히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낭만적 예술의 특징인 ‘예술 고유의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자기 초극의 과정을 거쳐 비예술, 절대적 정신의 다음 단계인 종교로 나아가야 한다. 더 나아가 철학으로 가면? 더 이상 형식이 필요없는 영역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이 낭만적 예술이 가진 자기 초극의 변증법의 특징이다. 외워라.
변증법이 뭐냐? 제발 정반합이라고 말하지 말라. 정반합의 변증법은 라볶이 이야기할 때에나 쓰기 바란다. 변증법은 way-up, 더 고차적인 것으로 올라가려는 것이다. 고전적 예술 형식에만 머물러 있으면 올라설 수 없다. 따라서 전체의 진리라는 맥락에서 보면 자기 초극하는 낭만적 예술형식이 더 탁월하다. 그리고 더 위로 올라가 예술의 종언, 예술의 종말을 가능하게 한다. ‘예술 이제 안합니다~’는 식의 종말이 아니다. 전체적 진리의 맥락에서의 예술의 종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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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철학]] 서론 강독 36주차 - 19.12~26
절대적 정신에 관하여 ‘타재에 있으면서도 자기의 곁에 있다’는 표현이 있다. 자기의 identity를 고수하면서도 타자의 입장을 충실히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이다. 자기Selbst와 타자를 동시에 보는 태도이다. 한 단계 위에 서서 보는 것이다. 그렇게 의식이 올라 서는 것, 그것을 물질적 관계 속에서 구현하는 것을 변증법적 지양이라고 한다. 영원히 교섭할 수 없는 타자를 교섭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내가 타자일 수 있고 타자가 나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신현상학 나오는 개념의 운동이다. 고정된 것을 유동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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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인간학] 14주차 -上
내가 신체적인 여건들을 규정하는 자연 법칙들에 전적으로 복속되어 있어서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자유 영역이 없다면, 나의 행위는 철저하게 자연 법칙의 결과에 불과하다. 이에 내가 옆에 있는 사람을 죽였다고 하여도, 옆에 있는 사람을 죽인 것은 내가 아니다. 자연 법칙이 죽인 것이다. 인과 필연적 사건들이 옆 사람을 죽인 것이니 자연법칙적으로 따질 일이지 도덕적으로 따질 일이 아니다. 이에 나에게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 나에게는 잘못 없다. 잘못을 물으려면 자연 법칙에게 물어야 한다. 그러면 도덕적으로 책임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러니 자유의지가 필요하다. 이는 도덕적 요구이다. 아니면 다 같이 도덕적이기를 포기하고 짐승으로서 살아가야 한다. 자유의지가 있음은 도덕적 요구이지 논증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칸트는 논증하려고 애썼다. 실은 순환 논법이었다. 그렇다고 칸트가 논증 하지 않고 선언만 했으면 철학 이론으로 정립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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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인간학] 12주차 -下 (전두표 필사)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정신과 육체가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별개의 실체가 아니다. 인간의 한 면과 다른 면이다. 인간은 자유를 갖고 있지 못하다. 자아가 확장되어 신이 될 때에야 자유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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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인간학] 12주차 -上 (전두표 필사)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물론 뇌수의 활동을 토대로 하지만, 즉 뇌수의 활동에 의존해 있지만, 심리적인 작용이 곧 뇌수와 동일시 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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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인간학] 13주차 -上
결과의 원인을 찾는 것이 과학적 사유이다. 계속 캐들어가면 막히는 부분에 도달한다. 이때 과학은 더 이상 탐구하지 못하지만 철학자들은 ‘무언가가 있다’고 상정한다. 지적 직관에 의해서. 캐물은 결과, 최초의 원인은 자기가 자기를 결정하는 놈임이 밝혀진다. 이 놈이 어디서 나왔나? 몰라. 무엇의 결과? 몰라. 자꾸 따지면 이율배반에 빠진다. 이를 칸트는 자유의 영역이라 불렀다. 이 영역 전까지는 자연의 영역이다. 자유는 비결정의 세계이다. 알고 보면 자기가 결정한 세계이다. 서양 말에서 자유Freiheit는 비결정을 뜻한다.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스스로에게서 유래한다自由’가 자유의 온전한 뜻이다. 칸트는 인간의 삶을 두 세계로 나누었다. 한 쪽에서 인간은 철저하게 자연 법칙에 귀속되고, 다른 한 쪽에서는 자유롭다. 인간은 두 세계에 모두 걸치고 산다. 그래서 괴롭다. 칸트 철학이 문제 해결은 못해주지만 인간이 왜 괴로운지는 밝혀주니 그나마 덜 괴로울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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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인간학] 10주차 -上
막스 셸러에 따르면 practical intelligence는 동물도 인간도 가지고 있다. 거기에서는 정도의 차이 밖에 없다. 그런데 식물에서 동물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행태 다시 말해 생Leben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 인간에게 있거니와 그것을 정신Geist이라고 한다. Leben과 Geist는 서로 통약되지 않는 영역이요 인간 만이 두 영역을 끌어 안고 있다. 셸러는 나아가 정신이 생화Verlebendigung des Geistes하고, 생이 정신화Vergeistigung des Lebeng하면 신이 된다Gottwerdung고 까지 주장하였다. 말년에 카톨릭에서 파문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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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인간학] 8주차
인간은 자연적 존재로서 동물과 달리 특정 자극에 대하여 기계적으로 법칙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제 2의 자연이 필요하다. 그것이 인간 스스로 개척하는 문화라는 세계이다. 이 문화라는 세계에는 인간 스스로 질서를 부여해야 한다. 이에 인간에게는 사회성이라는 또 하나의 과제가 주어진다. 사회화를 통하여 인간은 개체가 아닌 종적 존재로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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